기술의 발전은 생명체의 진화와 일견 닮아 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시장과 사용자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더 발전하지 못하고 도태된다. 대서양을 2시간 50분 만에 횡단하며 인류 앞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콩코드기는 높은 가격과 소음으로 승객에게 외면받으며 30년도 안 돼 대서양 상공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하지만 ‘시장의 선택과 진화’라는 기술발전의 메커니즘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극한의 조건에서 ‘임무달성’을 위해 개발되는 극한기술(extreme technology)이 그 예이다. 극한기술은 일반적인 ‘선택과 진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우주·국방·거대과학 분야에서 요구되는 ‘특별한 임무’는 시장의 선택이 아닌 과학자들의 극한 도전과 한계 돌파에 의해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극한기술의 결과물은 민간의 창의적 아이디어와 결합하며 파괴적 혁신으로 거듭나 우리의 일상을 바꿔 놓기도 한다. 로켓을 쏘아 올리기 위한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막대한 투자와 열정은 초정밀 기계와 첨단 소재기술 발전의 촉매가 돼 수많은 혁신적 제품으로 우리 생활을 변화시켰다.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한 미국 국방부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다양한 시도는 인터넷·자율주행·음성인식 등 새로운 산업의 지평을 여는 혁신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국가 연구개발(R&D) 생태계와 산업지형을 넓힐 하나의 대안으로 극한기술을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Nature)가 올해 과학기술 10대 이슈 중 첫 번째로 남극 빙하 연구를 꼽을 만큼 최근 남극은 극한기술 연구의 메카로 주목받고 있다. 남극의 혹독한 환경을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과학 난제의 실마리를 푸는 것은 물론 새로운 파괴적 혁신의 길을 여는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로봇·통신 등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할 각종 첨단기술에 남극은 천혜의 테스트베드를 제공해 지구 어디에서나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의 완성도와 안정성을 시험할 수 있게 해준다. 남극의 극저온 환경은 냉해에 강한 유전자나 단백질을 밝혀내는 등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농·생명 연구의 패러다임을 만들어가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지구의 역사와 생명의 기억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는 남극의 빙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데이터 플랫폼이다. 급속히 발전 중인 인공지능(AI) 등 첨단 연구기법과 연계된다면 이곳보다 기후변화로 상징되는 지구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모습까지 가장 먼저 구체적으로 내다볼 수 있는 장소는 없을 것이다.
최근 정부는 수소·바이오·빅데이터 등 과학기술에 기반한 혁신성장을 새로운 경제 비전으로 내세우고 있다. 기존 주력산업의 틀을 깨는 과감한 도전 없이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절박함의 표현일 것이다. 지금은 새로운 틀을 깨는 접근방법이 필요하고 우리가 극한기술에 대한 더욱 과감한 도전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필자는 어렵사리 남극 세종기지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뿌리 없이 땅이나 암반 표면에 부착·생육해 ‘땅의 옷’, 지의류(地衣類·lichen)로 불리는 식물을 접했다. 지의류는 광합성으로 영양분을 얻는 조류(藻類)와 이를 에너지원으로 몸체를 이루는 균류(菌類)가 공생하는 독특한 생명체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하등식물인 조류와 균류가 만들어낸 치열한 ‘협력과 공생’의 메커니즘이 생물 다양성이 가장 낮은 불모의 땅, 남극에까지 생명의 온기가 깃든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글로벌 기술경쟁이 그야말로 극한·무한으로 치닫는 요즘 남극 지의류의 지혜와 치열함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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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서울대 화학공학과 학·석사를 하고 미국 아크론대에서 화학공학 박사를 한 뒤 1982년 KIST에 들어와 2014년 3월부터 제23대·24대 원장을 하고 있다. 현재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이사,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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