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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고갈로 무너진 동로마

538년 고트족 몰아내고 로마 수복

538년 3월 12일, 로마 성벽. 1년 9개월 동안 공성전(攻城戰)을 퍼붓던 동고트왕국의 군대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동고트의 국왕 비스게스는 북부의 라벤나에 웅크렸다. 동로마(비잔틴)제국은 로마를 완전히 되찾았다고 여겼다. 476년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장군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가 멸망한 지 62년 만의 수복. 콘스탄티노플은 감격에 젖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로마를 20년 뒤 다시 빼앗겼다. 고트전쟁을 통해 로마제국이 남긴 도로과 상수도 시설 등도 기능을 잃었다.

로마 수복의 추동력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짜냈다. 반대파를 숙청하고 숙적 페르시아와 전쟁이 소강 상태를 보이자 그는 고토 회복 명령을 내렸다. 마침 젊고 유능한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있었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이 동로마는 낮게 평가하면서도 로마 전체 역사를 통틀어 최고 명장으로 꼽은 벨리사리우스는 언제나 적은 병력으로 싸웠지만 이겨왔다. 북아프리카 옛 카르타고의 땅에 게르만의 일족인 반달족이 세운 왕국과 전쟁에서는 1만 8,000여명으로 20만을 무찔렀다.

아프리카 속주를 회복한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 수복도 벨리사리우스에게 맡겼다. 535년 이탈리아 정복에 나설 때 병력은 불과 7,000여명. 벨리사리우스는 15만 명 이상의 동원 능력을 지닌 동고트를 누르고 마침내 로마를 되찾았다. 정작 로마 시민들은 그리스어를 쓰는 로마인(동로마제국)의 새로운 지배를 반기지 않았다. 동로마가 세금과 군역 등 과도한 의무를 부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고트족 치하에서도 해산되지 않고 유지되던 로마 원로원의 일부 귀족들은 자유를 보장하는 고트족 치하가 오히려 좋았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유스티니아누스의 계산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로마제국의 식량 생산지였던 북아프리카는 급속한 사막화가 진행되고 이탈리아에도 금은 보화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황제는 젊고 용맹한 벨리사리우스를 견제하려 온갖 술수를 부렸다. 결국 동로마는 567년 롬바르드족에게 이탈리아 북부를 상실할 때까지 20여년 간 전쟁비용으로 금 136t을 날려버렸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세계 3대 법전의 하나라는 로마법대전을 편찬하고 소피아 대성당을 건립해 ‘대제’로 기억되지만 재정 고갈로 동로마의 태양은 다시 솟지 못했다. 벨리사리우스 장군과 동년배인 동로마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비잔틴제국 비사’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를 이렇게 평가했다. ‘하늘이 보낸 역병’.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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