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종로구 송현동 49-1번지 일대 3만6,642㎡. 서울의 대표적 관광명소인 경복궁 옆에 자리한 대한항공의 ‘송현동 부지’다. 14일 찾아간 이곳은 높다란 담벼락으로 둘러쳐진 채 출입구는 낡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담장 곳곳에는 철망이 처져 있고 내부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한복을 차려입고 오가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질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이곳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자리로 꼽혀왔다. 서쪽으로는 경복궁, 동쪽으로는 창덕궁 등 궁궐이 들어서 있고 인사동과 북촌, 삼청동을 잇는 요지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는 안평대군과 봉림대군의 사저가 있었고 일제강점기 조선식산은행의 사택을 거쳐 광복 후에는 주한미국대사관의 직원 숙소로 쓰이기도 했다. 우리 근대사의 영욕이 고스란히 담긴 셈이다. 대한항공은 지난 2008년 삼성생명으로부터 2,900억원을 주고 부지를 매입해 한옥호텔과 함께 문화복합단지를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 금싸라기 같은 땅이 또다시 매물로 나온 이유는 뭘까.
2014년 3월.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관계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규제개혁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관광산업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학교 앞 호텔 규제를 완화하는 문제가 논의됐다. 유해시설이 없다면 학교 주변에도 호텔을 건립할 수 있다는 내용의 관광진흥법이 마련돼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서 75m 이상 떨어진 곳에는 학교정화위원회 심의 없이 호텔을 건립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업계에서는 인근 학교에 가로막혀 어려움을 겪던 대한항공의 호텔 개발사업에 청신호가 켜졌다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복합문화단지는 첫 삽도 뜨지 못한 채 10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대한항공은 호텔 건립의 꿈을 접어야 했다.
금싸라기 땅이 시장에 매물로 나왔지만 찾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한항공은 최근 행동주의 펀드의 압박에 못 이겨 매물로 내놓았고 일부 업체들이 고급 주택단지 후보지로 관심을 보인다지만 실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이곳은 경복궁과 인접한 관계로 고도 제한 등 규제가 많다. 호텔 건립의 걸림돌로 작용했던 풍문여고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지만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업계 관계자는 “일부 문제점을 보완하면 되는데도 호텔이 유흥업소라는 낡은 인식에 사로잡혀 랜드마크 조성의 꿈이 무너졌다”고 아쉬워했다.
송현동 부지가 세간의 관심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정치권이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군침을 흘리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문화센터를 짓겠다고 나섰고 종로구청은 공공 용도로 개발하자며 공원과 문화공간·공영주차장을 짓는 방안을 내놓았다. 청와대도 얼마 전 광화문 집무실 이전과 관련해 이곳에 사무실을 만들고 싶다며 관심을 표시했다고 한다. 정치권에서는 소나무가 많은 생태공원으로 만들거나 출판문화기지를 세우자는 제안도 내놓았다. 모두가 숟가락을 하나 얹겠다는 얘기다. 서울시는 대한항공 측과 땅을 맞교환하자며 마곡지구·강서지구 등을 후보지로 거론했고 영종도에 대체 호텔을 지으라는 제안도 했다고 한다. 너도나도 탐을 내지만 아무도 못 먹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셈이다.
서울 도심에서 갖가지 규제와 반기업정서에 가로막혀 개발에 난항을 겪는 사례는 송현동 부지만이 아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06년 서울 뚝섬의 옛 삼표레미콘 부지에 2조원을 들여 110층짜리 사옥 건립을 추진하다가 고도 제한 등의 규제에 막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2014년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를 10조5,500억원에 사들였지만 교통 혼잡과 부동산 가격 상승 등을 핑계로 내세운 정부 당국의 견제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개발심의 지연으로 지금까지 들인 이자비용만 5,000억원을 웃돌 정도다. 그나마 삼성동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는 지난 1월 정부 심의를 통과했지만 여전히 서울시의 눈치를 봐야 하는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롯데그룹은 과거 잠실 부지를 서울시로부터 매입했다가 한때 비업무용으로 몰려 강제 매각조치가 내려지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지금은 롯데월드타워가 번듯한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지만 그 과정에서 당국과 지난한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최근에는 표준지 공시가격이 껑충 뛰어올라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보유세도 기업들의 걱정거리다. 각종 규제로 예정됐던 생산시설을 제대로 짓지 못해 착공이 지연되는데도 세금은 꼬박꼬박 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명확한 기준도 없이 자의적 행정을 펼치는 바람에 이중의 정책 리스크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만 해도 삼성동 부지의 공시지가는 2015년 2,500억원에서 올해 5,670억원으로 41.75%나 올랐다. 같은 기간 보유세도 131억원에서 290억원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여기에 미래 자동차 개발을 위한 투자비용도 고민해야 한다. 현대차가 해외 투자자와의 공동 개발로 방향을 튼 것도 이런 복잡한 속사정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정부가 개발도 못하게 가로막고 세금만 챙긴다는 푸념이 절로 나올 판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자의적으로 행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결과로 기업들이 이중의 피해를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부동산 개발을 무조건 막기보다 도심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일본도 과거 수도권 규제에 집중하다가 지금은 정책을 바꿔 오히려 도심을 활성화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세계적인 명소가 된 도쿄의 롯폰기힐스 등이 대표적이다. 이명훈 한국도시재생학회 회장(한양대 교수)은 “도심 재생은 생활환경 개선뿐만 아니라 도시의 경쟁력, 나아가서는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마련”이라며 “획일적 규제에서 벗어나 민간기업의 참여를 적극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도심 복합개발 차원에서 과도한 공공성을 찾기보다 수익성을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부동산 개발은 대기업 특혜라는 낡은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는 한 수도 서울의 경쟁력은 도쿄나 홍콩에 비해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ssa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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