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노래하는 사람으로 남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대중가수 정태춘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음유시인, 사회 변화를 갈망한 이상주의자, 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함께한 시대의 메신저, 표현의 자유를 지켜낸 문화운동가 등 그는 한 세대를 풍미한 인기 가수이자 시대의 아픔을 함께한 지식인이기도 하다. 단순히 ‘가수’라고 지칭하기에는 그가 우리 사회에 던진 메시지들의 울림이 너무나 묵직하다. 하지만 최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정태춘·박은옥 40주년 프로젝트 사무실에서 만난 정태춘은 “노래로 많은 이야기와 행동을 전하기는 했지만 그저 노래하는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라며 “외부의 과분한 평가”라는 겸손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는 지난 1978년 서정성 짙은 자작곡 ‘시인의 마을’로 데뷔했다. 이후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 등 시적이며 목가적인 히트곡을 내놓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1987년 서울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연세대 이한열 열사 사건을 보면서 분노했다. 이후 음유시인은 거리의 시인이자 투사가 됐다. 전교조·전노협 등을 지지하는 공연을 펼치는 등 사회운동 현장에 참여하는 노래 운동가로 변신했다.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음반 사전심의 철폐다. 정태춘의 7집 앨범 ‘아, 대한민국…(1990)’은 사전심의에 공식 저항한 최초의 음반이다. 이후 1992년 두 번째 비합법 음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발표하며 저항을 이어갔다. 결국 1996년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음반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됐다. 이후에도 경기도 평택에서 미군기지 확장 이전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고향 주민들과 함께 ‘대추리 평화예술’ 운동을 진행하는 등 행동하는 예술활동을 펼쳤다.
그는 “처음에는 우수에 젖은 노래를 했지만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사람으로서 각성하려면 현장을 봐야 하고, 거침없이 쓸 수 있어야 하고, 겁먹고 쭈뼛쭈뼛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정태춘은 “지금 생각해보면 저항가수나 혹은 어떤 가수가 되겠다는 계획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며 “그냥 솔직하게 나오는 분노를 담아낸,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서의 앨범이었다”고 말했다.
부인이자 음악 동지인 박은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방탄소년단이 소속된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방시혁 대표가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분노와 불평이 지금의 나를 만든 동력이 됐다’고 말한 기사를 봤다”며 “정태춘씨도 분노와 불평을 계기로 뭔가를 바꿔 나가려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태춘은 “앨범 ‘아, 대한민국…’은 독선적이고 거칠고 조절되지 않은 감정을 담아 지금 내가 들어도 불편하다”면서도 “그 당시에 저항적인 노래와 운동 진영의 노래가 많이 나왔지만 리얼리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더 리얼하게 우리의 현실을 고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저항하던 음유시인은 어느 순간 대중의 곁을 떠났다. 그는 스스로 “시장에서 상품성이 없는 존재가 됐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시장에서 가장 대중의 취향에 맞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서 이윤을 내지도 못하는 존재가 됐다”는 회의감이 밀려왔다는 것이다. 정태춘 2002년 10집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이후 사실상 작품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10년 후인 2012년 앨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내기는 했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박은옥을 위한 앨범이었다. 정태춘은 “작품과 방송활동을 모두 접고 생계를 위한 초청공연 정도만 응했다”며 “붓글·사진·가죽공예 등 음악이 아닌 다른 활동으로 지난 시간을 채웠다”고 말했다.
정태춘은 음악활동을 접은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 세계화와 산업주의라는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낙관론에만 빠졌고 기대했던 노무현 정부도 사회 내부의 차별이나 갈등·야만성을 해결하지 못했다”며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세계화가 절대적인 가치로 사회를 지배하는 과정을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가 산업을 위해 (사람이나 자원을) 재배치하고 동원하고 통제를 하는 상황이 됐다”며 “그런 변화와 야만성·비윤리성에 동의할 수도, 그것을 따라갈 수도 없다는 생각에 문명열차에서 뛰어내렸다”고 설명했다. “대중음악가라면 대중의 생각·기호·취향을 따라가야 하지만 되레 내 생각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태춘이 오랜 시간 팬들과 거리를 뒀는데도 대중과 문화예술계는 정태춘·박은옥을 잊지 않았다.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2009년 데뷔 30주년 프로젝트에 이어 올해도 데뷔 40주년 프로젝트를 꾸렸다. 영화·문학·미술 등의 분야에서 144명이 모여 유례없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특정 아티스트를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집중조명하고 분석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정태춘은 “재미있게 놀아보자, 내가 가진 것이 뭔가 있다면 다 가져가라는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며 “학술로든 전시로든 앨범으로든 콘서트로든 다 꺼내서 다 보여주고, 평가받고, 정리하자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남들에게 좋게 평가받고 나를 자랑하고 전시하려는 마음을 놓을 만큼의 나이가 됐어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노래가 이런 것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싶고 젊은 작품자들에게 작게나마 영감 같은 것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지나치게 겸손할 것도 없고 너무 과하지 않게 전해졌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주변의 관심이 과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천천히 1년을 가보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40주년 프로젝트에는 콘서트는 물론 기념 앨범, 전시, 학술, 트리뷰트 프로그램 등 다양한 행사가 마련됐다. 40주년 기념 앨범에는 20년 전에 만들었다가 발표하지 않은 ‘외연도에서’와 올해 1월 가족을 위해 만든 ‘연남, 봄날’ 등 신곡 2곡이 들어간다. 앨범 테마는 ‘노인의 목소리로 젊은 시절의 노래를’로 가수인 딸 정새난슬과 함께 부르는 곡들도 수록됐다.
정태춘에게 지난 40년간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무엇인지 묻자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특별히 기억날 만한 것, 소회 같은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정태춘은 “최근 KBS ‘불후의 명곡’ 녹화장에서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외국에 온 것 같다’고 대답했다”며 “가수생활을 접은 지 오래이기 때문에 후배들이 내 노래를 부르는데 제3자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정태춘에게 2019년의 대중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내가 잘 모른다”고 운을 떼면서도 “지금의 대중문화는 문화라기보다 산업”이라고 꼬집었다. 엔터테인먼트만 남고 ‘아트’는 없다는 것이다. 정태춘은 “아트란 작가정신이나 작품자의 창작 의지가 담겨 작가들의 개별적인 미의식을 담아내는 것”이라며 “지금은 거대한 엔터테언먼트의 파도에 휘말려서인지 이런 작가 의식을 가진 아티스트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직접 사회운동을 실천한 만큼 정치에 뛰어들 생각은 없느냐고 묻자 “정치는 예술가들의 사변(다양한 생각들을)을 풀어낼 수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시인이 정치가가 되면 예술적인 영감이나 그것을 말로 풀어내는 사변이 사라진다”며 “오직 정치는 힘의 싸움, 누가 이기고 지느냐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가는 정치인이 되지 못하고 정치인이 되더라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고 밝혔다.
정태춘은 “앞으로 별다른 목표는 없다”고 말했지만 그의 메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태춘은 이제 ‘네 번째 깃발’을 준비 중이다. 그는 “첫 번째 깃발이 전교조 합법화 싸움, 둘째가 검열(음반 사전심의제도) 철폐, 셋째가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이었다면 네 번째 깃발은 ‘시장 밖 예술’”이라며 “이제 시장 메커니즘을 통하지 않고도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예술문화, 시장 밖 예술을 이야기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현진기자 stari@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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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경기도 평택 도두리 △1978년 ‘시인의 마을’로 데뷔 △1979년 ‘MBC가요대상’ 신인상, ‘TBC방송가요대상’ 작사 부문상 △1985~1987년 ‘정태춘 박은옥의 얘기노래마당’ 전국 순회공연 △1988~1989년 정태춘 노래극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 전국 순회공연 △1990년 사전심의 거부하며 비합법 음반 ‘아, 대한민국…’ 발표, 사전심의 폐지운동 전개 △1993년 두 번째 비합법 음반 ‘92년 장마, 종로에서’ 발표 △1996년 ‘민족예술상’ △2004년 시집 ‘노독일처’ 발간 △2007년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2009년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2012년 정태춘 사진전 ‘비상구’ △2019년 데뷔 40주년 기념 앨범 ‘사람들 2019’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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