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미 양국이 한국을 동시에 압박하는 모양새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북한에 대한 추가제재 철회를 지시해 일단 북미 양국이 정면 충돌하는 것은 피했습니다. 하지만 북미 사이의 입장 차, 그 사이에 낀 한국의 상황은 여전합니다. 미국은 “한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설득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반면 북한은 “한국이 미국의 강경한 입장을 완화하라”며 우리 정부를 조이는 상황이죠. 문재인 대통령으로서는 미국 말대로 북한에 강경한 입장을 내놓자니 이번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북한 철수’ 사태에서 보듯 북한이 아예 비핵화 협상 궤도에서 이탈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북한 말마따나 미국을 설득하려 해도 강경한 미국 입장을 누그러뜨리기는 커녕 한미동맹의 균열만 낳을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딜레마에 빠진 형국입니다.
◇北, 남북관계 볼모로 ‘남한이 미국 설득하라’ 압박
우선 북한이 강수를 빼 들었습니다. 북측은 22일 남북 대화 창구였던 개성 공동연락사무소에서 철수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왔습니다. 정성장 세종연구원 연구기획본부장은 “한국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대미 설득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는 미국 재무부가 북한 제재 회피를 도운 중국 해운회사 2곳에 제재를 가한(현지시간 21일) 직후 입니다. 남북 연락사무소 철수를 통해 ‘남한이 미국의 제재 강화 움직임을 저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남북관계 개선도 없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미국이 ‘빅딜’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데 남북관계를 볼모로 이러한 미국의 입장을 누그러뜨리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풀이됩니다. 아울러 미국의 눈치를 보지 말고 남북 정상회담 때 합의한 경제협력 사업은 그대로 추진하자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美는 “韓이 北 비핵화 설득해야”
정부는 미국으로부터도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21일 북미 비핵화 협상 핵심 실무자였던 앤드루 김 전 미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 신기욱 미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APARC) 소장 등을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신 소장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미국은 정 실장에게 “핵 협상의 동력을 살리기 위해 한미 간의 공조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라며 “한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우리의 대북정책은 비핵화를 촉구하기보다는 남북 경제협력을 통해 북한이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달래는 쪽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미국은 이런 정책 방향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요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의 생각은 신 소장의 칼럼에 잘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 소장은 최근 한 칼럼에서 “한국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임기응변식의 어설픈 중재가 아니라 북한에 완전한 비핵화를 설득하고 대신 체제 보장 등 북한이 불안해하는 부분은 미국·중국과 만나 해소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北, 해외 공관장 본국 소집령...강경 메시지 발표 가능성
정부는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서울경제신문 펠로(자문단)인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북한의 연락사무소 철수는 핵·미사일 실험 재개의 예고편일 수 있다”며 “청와대가 상당히 곤욕스러운 상황과 맞닥뜨렸다”고 분석했습니다. 정성장 본부장도 “북한이 최근 주요 국가 공관장을 평양으로 불어들이고 있다”며 “대외정책의 전환을 모색하는 징후일 수 있다. 강경한 성명을 발표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내다봤습니다. 최악의 경우 한반도 정세가 북한의 핵도발이 계속되는 평창올림픽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이야깁니다.
◇곤욕스러운 靑...남북미가 ‘비핵화’ 개념부터 일치시켜야
정성장 본부장은 당장 판문점에서 남북 실무형 정상회담이라도 개최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그는 “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직접 만나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과 빅딜을 추구하도록 적극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5월 일왕 즉위에 맞춰 일본을 방문할 예정인 가운데 이때를 기해 판문점에서 3차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조언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기본인 비핵화 개념에 대해 남북미가 우선 합의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범철 센터장은 “지금까지는 미국, 북한이 보는 비핵화가 서로 달랐다”며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셈”이라고 꼬집었습니다. 미국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했지만 북한은 괌, 하와이 등에서 한반도에 핵을 떨어뜨릴 수 있는 전략자산 철수 및 나아가 역시 핵 공격 능력이 있는 주한미군의 한반도 철수까지를 비핵화로 봤을 수 있습니다. 신 센터장은 “우선 비핵화의 개념부터 일치시키는 등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이태규기자 classic@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