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극작가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은 1879년 초연 이래 세계 연극사는 물론 페미니즘 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다. 연극은 노라가 엄마나 아내가 아닌 자아와 정체성을 찾아 집을 떠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140년 전 당시로선 파격적인 결말로 격렬한 사회적 논쟁을 몰고 있다.
미국의 극작가 루카스 네이스의 ‘인형의 집 파트 2’는 이혼 선언을 했던 노라가 15년 만에 다시 돌아와 남편과 딸, 유모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2017년 브로드웨이 초연 이래 이듬해 27개 극장에서 공연되면서 미국에서 가장 많이 상영된 연극에 선정됐다. 국내에서는 내달 10일부터 28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선보인다. 노라 역을 맡은 서이숙·우미화과 남편 토르발트 역을 맡은 손종학·박호산을 최근 LG아트센터에서 만났다.
이들 주연 배우들은 “오롯이 배우의 힘으로 극을 끌고 가는 작품이어서 더 출연 욕심이 났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노라 대 토르발트, 노라 대 딸 에미, 노라 대 유모 앤 마리의 치열한 언어 싸움이 볼만할 것”이라며 “마치 ‘100분 토론’이나 ‘썰전’을 보는 듯 흥미로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드라마와 연극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중년의 베테랑 배우들이다. 이 때문에 마치 랩을 하듯 쏟아내는 공격적인 말들과 ‘팩폭의 진검승부’에 대한 기대감이 높다. 드라마로 치며 김수현 작가의 차진 말싸움의 향연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에서도 노라는 원작에서처럼 여전히 성장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캐릭터다. 다만 원작이 노라가 한 여성으로서 각성하는 데 초점이 맞췄다면 ‘파트2’는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데 집중했다. 그동안 ‘강한 여성’ 역을 표현해온 서이숙은 “노라는 15년 후 작가로 성공해 돌아오지만 남편, 딸, 유모는 변한 게 없다”라며 “똑같은 벽에 다시 부딪히고 답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설명했다. 우미화도 “집나간 여장의 상징인 노라는 여전히 아내, 엄마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한다”며 “이번 작품은 부부, 혹은 결혼 제도를 다루면서 한편으로는 개인이 얼마나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하는지 의문을 던진다”며 소개했다.
‘가부장 꼰대’ 같은 남편 토르발트에게도 고민은 있다. 손종학은 “각성하고 행동하는 자의 식구로 산다는 것은 참 어렵구나 라는 것을 느낀다”며 “은행장 체면에 아내가 이혼 선언을 하고 떠났다는 말을 못하고 꾹꾹 참는 심정도 이해해 달라”고 전했다. 그는 드라마 ‘미생’에서 ‘꼰대 중의 꼰대’를 인상적으로 연기한 바 있어 이번에도 가부장 연기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손종학은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상징적인 인물이 토르발트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약간의 진일보한 면을 보인다”고 덧붙였다.
박호산은 “진지할 때는 진지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순풍산부인과’처럼 시트콤 같은 연기를 펼칠 것”이라며 “노라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무대에서는 토르발트 역에 충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슬기로운 깜빵생활’에서 문래동 카이스트로 출연해 친근한 연기를 선보였다. 이처럼 이 작품은 젠더 갈등보다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내 말은요. 결혼이 사람을 오히려 아주 나쁜 쪽으로 몰고 간다고요. 자 봐요. 결혼 전에 구애할 때랑 결혼하고 나면 완전히 딴사람이 되잖아요. 친절하고 매력적이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서로에게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예요. 결혼이라는 계약은 죽을 때까지 함께 하기로 맹세했으니 서로 기분 내키는 대로 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주는 거 아니겠어요. 서로에게 어떤 대접을 받든 상관없이 말이에요. 그런 일이 일어나요. 항상, 그렇게 사람들은 불행해지고요.”
서이숙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되돌아보자는 차원에서 전한 노라의 극중 대사다. 이번 연극이 19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했지만 남녀 갈등이 커지고 황혼이혼이 급증하는 요즘 한번쯤 곱씹어 볼만한 말이다.
/연승기자 yeonvic@sedaily.com 사진제공=LG아트센터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