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56·사진) 감독은 지난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로 흥행 잭팟을 터뜨린 이래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식지 않는 창작열을 내뿜고 있다. 늘 도전적인 소재를 다루는 탓에 흥행에는 부침이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의 작품은 발표와 동시에 세계 영화계에 논쟁적인 화두를 던진다. 10편의 장편영화를 내놓는 동안 두 차례나 칸 국제영화제의 경쟁 부문에서 본상을 거머쥔 박찬욱은 세계적인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할리우드와 충무로를 넘나들며 여전히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는 박찬욱이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을 들고 돌아왔다. 이 작품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대가인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1979년 이스라엘 정보국의 작전에 따라 스파이가 된 무명 배우 찰리(플로렌스 퓨 분)와 그를 둘러싼 비밀 요원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영국 방송사인 BBC가 제작한 이 드라마는 29일 VOD(주문형비디오) 스트리밍 서비스인 왓챠플레이를 통해 국내에 공개된다. 지난해 영미권에서 방영된 버전과 비교하면 플롯 전개 방향과 사운드·색감 등에 변화를 준 감독판이다. 데뷔 후 처음으로 연출한 드라마로 국내 관객과 만날 채비를 하는 박찬욱을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박찬욱은 이번 신작에 대해 “긴박한 첩보 스릴러와 로맨스를 결합한 이야기”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복합장르 안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분쟁 같은 정치적인 이슈와 ‘순진한 여성의 성장 스토리’라는 고전적인 패턴을 함께 담고 있어 소설을 읽자마자 직접 연출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고 밝혔다.
박 감독은 분단 현실이 반세기 넘게 이어지는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을 묘사하는 데 특별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는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악순환을 보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어쩔 수 없는 동병상련을 느낀다”며 “이미 르 카레 작가가 성실한 취재력으로 완성한 원작이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역사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세계 각국의 시민들이 한반도의 분단 상황에 아무 관심이 없다면 얼마나 외롭고 허탈하겠느냐”라며 “비록 우리와는 멀리 떨어진 지역이지만 수십 년 동안 되풀이되는 폭력을 성찰해 볼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리틀 드러머 걸’에는 최근 관심사인 여성 서사에 대한 관심도 담겨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찰리는 힘겨운 고난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을 만큼 대담하고 용감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박 감독은 “영화 ‘레이디 맥베스’를 보고 플로렌스 퓨에게 반해 만나봤는데 소신도 뚜렷하고 말도 거침없이 하더라”라며 “사랑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무릅쓸 수 있는 찰리의 캐릭터와 실제 배우의 성격이 잘 맞을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박찬욱은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콘텐츠 시장이 급변하는 상황에 대한 생각도 털어놓았다. 그는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분량이 3~4시간 이상이 되면 극장을 벗어나는 수밖에 없겠지만 웬만하면 극장 상영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라며 “찍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이야기가 있을 때만 드라마 또는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콘텐츠를 연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사진제공=퍼스트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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