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11월 평남 강서군 초리면 봉상도(일명 도롱섬)에서 태어난 선생은 18세에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하고 조교를 맡아 학생을 지도했다. 독립협회에 가입한 뒤 귀향해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 민권운동에 뛰어들었다.
1902년 결혼 직후 미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리버사이드 일대의 한인지도자로 부상했다. 1905년 4월에는 동지들과 조국 광복을 목표로 삼는 미주 한인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했다. 1907년 5월 공립협회 제3대 회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언론 활동과 교육진흥, 실업진흥 등 여러 가지 구국사업을 전개했다. 조국 독립을 추구한 국내 비밀결사인 신민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1913년 5월 8도 대표를 선정해 민족을 지도해 나갈 수 있는 중견 인물을 배출하기 위한 동맹수련단체로서 흥사단이 출범했다. 선생의 주도로 조직된 흥사단은 무실역행, 국민개업 등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적 재정후원과 일꾼 양성을 통한 민족독립의 사명 완수에 매진했다.
1919년 5월 상하이에 도착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했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일왕 생일 행사장인 홍커우공원에 폭탄을 투척한 날 상하이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던 선생은 민단장으로 오인되어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됐다. 이후 국내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대전감옥으로 이송되는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5년 2월 가출옥했다.
일제는 국내 민족운동 일체를 말살하고자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을 일으켰다. 선생을 비롯한 180여명의 동우회 회원들은 종로경찰서로 넘겨져 135일간 집중 조사를 받고 8월 15일 예심종결을 거쳐 ‘치안유지법 위반’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지병 악화로 보석으로 출소했지만, 1938년 3월 서거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해군은 작년 9월 우리나라가 독자 설계한 첫 3,000t급 잠수함(2022년 1월 실전 배치 예정)에 ‘도산안창호함’이라는 함명을 붙였다.
/권홍우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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