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우희가 ‘우상’ 을 촬영하던 시기는 배우 故 김주혁이 세상을 떠난 시기와 겹쳤다. 지난 2014년 ‘한공주’로 괴물 신인 감독의 탄생을 알렸던 이수진 감독의 차기작 ‘우상’과 함께 한 2년여의 시간, 그리고 갑작스런 김주혁의 죽음은 배우 천우희가 많은 걸 깨닫게 했다.
지난 20일 개봉한 영화 ‘우상’은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정치 인생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 남자 구명회(한석규 분)와 목숨 같은 아들이 죽고 진실을 쫓는 아버지 유중식(설경구 분) 그리고 사건 당일 비밀을 간직한 채 사라진 여자 최련화(천우희 분), 그들이 맹목적으로 지키고 싶어 했던 참혹한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최근 삼청동에서 만난 천우희는 “‘우상’을 촬영하는 동안 무엇 때문에 연기를 하는지,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끊임없이 고민했다”고 털어놨다.
“‘우상’은 제 한계를 맛보게 해준 작품이죠. 연기를 잘하고 싶었고, 못한 것 같아서 스스로 자책하고 그랬던 시간들이 너무 괴롭고 힘들었지만 ‘무엇을 위해 연기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시간이었어요. 잘하는 걸 넘어서서 한 차원 다른 연기가 무엇일지 궁금했고 또 부러웠어요. 원래 작품 외적인 것들을 작품 안으로 가져오지 않는 편이라 외부적인 것에 흔들림이 없는 스타일인데, 이번에는 그게 잘 안되다 보니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고(故) 김주혁 선배님을 떠나보내며 “저를 돌아보게 된 것 같다”고 말을 이어간 천우희. 그는 “나름대로는 연기할 때 ‘영혼을 갈아넣어서 한다’는 신념으로 정말 온 힘을 다해 뛰어들곤 했는데 그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다”고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왜 나는 이렇게 어렵게 살까’ ‘나만 힘들까’ ‘왜 이렇게 마음대로 안 될까’ 등등 우울하고 부질없는 생각들이 끊이질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자기 연민에 더 빠져들었죠. 그런 저와 ‘우상’ 속 련화가 만나면서 어떤 접점이 생기고 아픈 시너지를 낸 것 같아요. 상황들이 그랬던 것 같아요.”
늘 완벽한 연기를 하고 싶었던 천우희에게 ‘우상’은 ‘왜?’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작품이었다. 최련화는 중식(설경구)의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한 날 함께 있다 홀연히 사라지는 인물이다. “계급적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있을지 모르지만 수틀리면 가차 없는 무서운 캐릭터”라는 이수진 감독의 말처럼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극단적인 선택도 서슴지 않아,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
“막상 최련화를 연기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서는 두렵기도 했어요. 련화 캐릭터를 연기하며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이 인물이 눈썹이 뜯긴 채 나와야 하는 인물인 점 등 비밀에 가려진 게 많아 외부적으로 알려지면 안되는 이유도 있었어요. 세고 강한 캐릭터는 많이 해본 적이 있어 연기 변신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간절함과 처절함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이 컸죠. 매 씬이 항상 산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고비 넘으면 또 한고비가 나타났어요.”
영화 개봉 후 비로소 ‘련화’를 품에서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며, 홀가분한 모습을 보였지만, 천우희는 미스터리한 이 인물이 혹여나 비호감으로 보일까 걱정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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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련화에게 연민을 느꼈어요. 처절하고 불쌍했죠. 련화가 너무 이질적이거나 먼 사람이 아닌, 호감까지는 어렵겠지만 비호감은 아닌 사람이길 바랐어요. 련화 캐릭터 자체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설명되는 인물이라 나 또한 상상이 많이 필요했어요. 련화는 세 인물중 가장 솔직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잖아요 그래서 순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연기할 때 어떤 의도를 담지 않았던 것 같아요. ”
“강하고 센 캐릭터를 많이 해봐서 이번에도 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랐어요. 무엇보다 이 인물의 감정을 6개월 동안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어요. 작품을 끝내고 돌이켜보면 힘든 걸 해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어요. 2번째 작품을 같이 하면서 이수진 감독님에게도 감사하고, 이 캐릭터도 또 언제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란 점에서 감사했어요.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저 감사하고 모든 게 소중해지더라. 조금씩 조금씩 더 나아지려는 제 모습을 돌아보게 한 작품이랄까요.”
올해 연기 인생 15년차에 접어든 천우희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켜준 작품은 ‘써니’(2011)의 본드 소녀 상미였다. 이후 이수진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한공주’(2014)에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시련을 겪는 17살 소녀의 감정을 섬세하게 연기, 제35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제35회 한국영화평론가 협회상 여우주연상, 제51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연기상 등을 포함해 무려 13관왕을 차지하며 주연배우로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어 ‘해어화’, ‘손님’ 등에서 자기만의 색을 착실히 쌓아가던 천우희는 ‘곡성’에선 외지인이 나타난 후 벌어지는 의문의 연쇄 사건 목격자 무명 역을 맡으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그녀만의 영역을 만들었다.
이번 ‘우상’으론 어떤 필모그래피를 써내려갈까. 이수진 감독은 “ ‘한공주’ 가 끝나고 5년이란 시간동안 천우희란 배우가 어마 어마하게 성장했구나란 걸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련화라는 인물은 천우희 말곤 떠올릴수가 없다”라며 ‘보석’ 같은 배우에게 극찬을 보인 바 있다. 실제로 끝없는 연습으로 연변 사투리와 중국어를 완벽히 구사했고 캐릭터를 위해 눈썹을 전부 미는 열정까지 보이는 등 파격적인 외모 변화도 마다하지 않았다.
스스로 련화 캐릭터에 잠식당할까 봐 두려움이 컸던 천우희는 그 두려움을 용기있게 이겨내고 ‘역시, 천우희’라는 평을 이끌어내고 있다.
”연기가 주어지는 게 저한테 큰 의미가 있겠지만 그 의미를 계속 찾아야죠. 아직까진 모르겠어요. 연기도 삶처럼 같이 가야 하는가보다 그렇게 느껴져요. ‘우상’이 이제 내 손을 떠나는구나 해서 마음이 울적하기도 해요. 또 한편으로 2년 동안 같이 있던 애라 빨리 보내주고 싶기도 하네요.“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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