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초라할 정도로 휑했다. 주인공 여옥과 대치가 철조망 사이로 키스하는 하이라이트 장면조차 겨우 철사줄 몇 가닥이 소품의 전부였다. 하지만 펑펑 우는 관객들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올려진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이야기다.
이 작품은 김성종의 동명 대하소설이 원작으로, MBC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평균 시청률 44%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당초 원작의 완성도와 3·1운동 100주년이라는 역사적 의미에다 수십억원이 투자되면서 대작 뮤지컬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투자 유치가 무산되면서 공연 자체가 엎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공연을 살린 것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이었다. 제작사인 수키컴퍼니의 변숙희 대표는 “배우들이 어떻게든 공연을 일단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 계약금만 받고 출연했어요. 디자이너 비용도 받지 않았고 렌털을 무료로 해주는 곳도 있었죠. 정말 열악한 상황에서 십시일반으로 올렸는데 관객 반응이 좋아 감사할 따름입니다”라며 먹먹해진 소감을 기자에게 전했다.
이 작품은 제작비를 최소화하는 대신 파격적인 실험을 단행했다. 썰렁한 무대를 보완하기 위해 무대 양옆에 객석(나비석)을 배치한 것이다. 이 때문에 관객들은 바로 옆에서 배우들의 눈물과 땀을 보고 숨소리마저 들을 수 있다. 고육지책 끝에 마련한 무대가 오히려 역사의 비극에 휘말린 주인공들의 삶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효과를 준다.
이 뮤지컬은 지난 3월1일 첫 공연 이후 관객들과 평론가들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애절하고도 가슴 아픈 작품의 내용 못지않게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헌신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대목이다. 사실 뮤지컬업계는 철저하게 ‘자본의 법칙’이 적용되는 동네다.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등장해 판을 키우더니 제작비 100억원을 훌쩍 뛰어넘는 블록버스터 뮤지컬이 잇따르고 있다.
물론 ‘여명의 눈동자’에 출연한 배우와 스태프들의 희생이 당연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한국 공연계의 열악한 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무대의 예술과 감동을 완성하는 것은 돈이 아닌 배우들의 열정과 애정이라는 생각도 들게 된다.
/연승기자 yeonvic@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