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충·문사철·문레기….’
실용 학문을 우대하는 사회적 경향이 짙어지며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를 폄하하는 신조어가 낯설게 들리지 않게 된 요즘 인문학적 가치에 주목해 약진을 이어가는 대학교가 있다. 다음달 개교 70주년을 맞는 경희대는 최근 해외 유수 기관의 대학 평가에서 잇달아 높은 성과를 거두며 ‘100년 경희 대계’를 준비하고 있어 대학가의 관심을 받고 있다.
경희대의 공학계열 학생 수는 전체의 20%로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국내 주요 대학의 23~42%와 비교해 상당히 낮다. 인문학적 가치를 외면하는 사회 현실을 감안한다면 지표나 영향력 면에서 점차 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하지만 경희대는 최근 영국 유명 대학평가기관인 타임스고등교육(THE)의 대학 영향력 평가에서 세계 27위를 차지하며 전체 국내 대학 중 1위에 올랐다. 앞서 나온 ‘2018 상하이교통대 세계대학평가(ARWU)’에서는 호텔 관광 분야가 세계 8위, 국내 1위를 차지하며 국내 종합대학 최초로 세계 10위권 학과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 같은 경희대의 약진은 대학의 ‘본연’인 ‘학술문화진흥’에 집중해 이뤄낸 결과라는 게 대체적인 진단이다. 차별화를 위해 일부 이공계열 인기 학과에 지원을 집중하고 융합 학과 개설에 치중하는 일반 대학들과는 달리 창학 초기부터 학술 기관의 정체성을 다지고 ‘지속 가능한 미래’에 기여하는 대학 본연의 책무에 집중한 것이 되레 높은 평가로 이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경희대의 한 관계자는 “지난 10여년간 ‘대학다운 대학’을 향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대학의 핵심가치 강화에 주력해 교육과 연구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학술진흥 문화를 조성했다”며 “이로 인해 인문·사회·자연·공학·예체능·의학 계열 등 전 학문 분야가 고루 발전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문 분야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11년 전교생이 의무적으로 수양해야 하는 전문적 교양교육기관인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개설한 것도 같은 배경이다.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전공 분야와 밀접히 결합 돼야 한다는 기치 아래 탄탄한 기초 교양을 목표로 시민교육·글쓰기 등이 어우러지는 인문학 중시 교육을 실시하며 대학 교양교육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최근에는 전교생이 필수로 수강해야 하는 세계시민교육강좌도 국내 최초로 개설해 각계의 주목을 받았다.
대학의 본연인 학술진흥문화 구현에 치중하자 세계적 학과 및 교수가 늘어나며 자체 역량 강화로 이어졌다. 경희대 일반대학원 나노의약생명과학과 정서영 교수, 식품영양학과 임종환 교수, 동서의학대학원 융합건강과학과 박은정 교수 등 3명의 교수는 2017년에 이어 2018년에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자(HCR)’에 선정됐다. HCR은 논문 피인용 횟수가 세계 상위 1%에 해당하는 연구자를 말한다. 경희대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6년까지 7년간 전임교원 논문당 피인용은 1.7배, 국제 공동 연구 비율은 1.4배 상승했다.
이 같은 학술 진흥은 놀랍게도 산학 협력의 확대로 돌아왔다. 이공계 비율이 높지 않은 학교 특성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근간을 다시 세운다는 목표하에 진행해온 혁신들이 산학협력 비율을 높이는 원인이 된 것이다. 대학정보공시에 따르면 경희대의 2016년 기준 기술이전 수입은 2009년 이후 7년 동안 4배 가까이 늘었다.
이런 성과는 학교 브랜드 선호도가 꾸준히 상승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공인회계사·행정고시 등 각종 고시에서 ‘톱5’급 성적을 내며 우수 학생들이 더욱 관심을 갖는 배경이 되고 있다. 외국인 학생 유치 비율도 국내 1~2위 급으로 글로벌화에도 앞장서 주목받기도 한다. 인문학에 대한 고른 투자가 성과로 돌아오면서 이과가 배치된 국제캠퍼스의 경쟁률까지 상승, 학교 이미지 제고에 더욱 효과를 내고 있다. 임성호 하늘교육 대표는 “안정적 재단을 배경으로 꾸준한 투자와 지휘가 이뤄지면서 인문 중심 대학이지만 남다른 상승세로 주목받는 학교”라며 “학생부 종합전형에서도 우수한 입학사정관을 배치해 좋은 학생들을 잘 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실제 경희대의 창학 이념인 ‘문화세계의 창조’는 생명과 우주, 역사와 문명 속에서 ‘인간적인 삶’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사유하고 실천하는 행위로부터 출발한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모두가 실용학문을 외치던 2009년에도 경희대는 개교 60주년을 맞아 ‘지구적 존엄 구현’을 새 비전으로 선포하고 학술적 성취가 사회와 세계를 위한 실천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해왔다.
오는 5월 개교 70주년에 맞이하는 경희대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주는 대학에 책무에 더욱 충실해 ‘경희 100년’이 미래상을 열겠다는 계획이다. 대표 프로젝트 중 하나인 ‘블루 플래닛(Blue Planet) 21’은 기후변화, 미세먼지, 식량·에너지 문제 등 과학 기술 문제 해결을 위해 법적·윤리적·사회적 파장을 동반 연구하는 글로벌 관산학 연계협력 프로그램으로 꾸며진다.
경희대의 한 관계자는 “대학의 근간인 인문 학술적 가치에 집중한 것은 시대를 역행한 것이 아니라 앞서 간 것”이라며 “앞으로도 경희 고유의 학풍으로 자리 잡은 교육·연구·실천의 창조적 결합에 주력해 미래 사회를 선도하는 인재 배출에 힘쓸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희원기자 heew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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