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45년 11월20일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인류의 양심과 정의를 실현하는 역사적인 재판이 열렸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비롯한 수많은 인명을 앗은 나치 전범들을 단죄하기 위한 재판이었다. 1년여 동안 450회 이상의 공판을 진행한 끝에 열린 이 마지막 재판에서 142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 가운데 12명은 사형을 당했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대량 학살’과 ‘반(反)인륜 범죄’였다.
영국 출신의 인권 변호사이자 국제인권법 권위자인 필립 샌즈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교수가 쓴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는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실제로 겪은 참상과 뉘른베르크 재판 과정을 엮은 논픽션이다. 지난 2016년 영미권에서 출간되자마자 가디언·파이낸셜타임스·이코노미스트 등 세계 주요 언론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저자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이중의 탐정소설’처럼 펼쳐진다. 첫 번째 갈래는 나치가 저지른 야만적인 범죄를 다양한 자료와 증언을 통해 복원하는 작업이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핵심 인물은 다름 아닌 저자의 외할아버지다.
1904년생인 외할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우크라이나의 리비우에 살고 있었다. 당시 이 도시가 역사의 끔찍한 격류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외할아버지와 같은 유대인이 10만명 넘게 모여 사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나치가 ‘우생학에 기반을 둔 인종 개량’이라는 터무니없는 논리를 들고 나오면서 외할아버지의 가족과 친척들은 꼼짝없이 학살을 당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외할아버지는 프랑스 파리로 망명을 간 끝에 목숨만은 부지했지만 90세가 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치를 향한 들끓는 적개심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나치가 저지른 만행은 독자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지만 사실 이 자체로는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다. 그동안 이미 많은 예술 작품과 저서가 나치의 범죄를 파헤치고 고발했기 때문이다. 샌즈 교수의 저서를 특별하게 만드는 대목은 뉘른베르크 재판 과정을 치밀하게 복원한 두 번째 갈래다.
저자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참여했던 유대계 법학자인 허쉬 라우터파하트와 라파엘 렘킨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공교롭게도 외할아버지가 파리로 명망을 가기 전 살았던 리비우에서 대학을 나온 두 법학자는 2차 대전 승전국인 연합국의 검사들이 나치 전범들을 합당한 죄목으로 기소할 수 있도록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들은 450회 이상 진행된 공판 과정에서 인종·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집단을 대량 학살하는 행위를 뜻하는 ‘제노사이드’ 개념을 창안했다. 제노사이드는 인종을 의미하는 ‘genos’와 살인을 뜻하는 ‘cide’를 합친 단어다. 연합국 검사들이 나치 전범들의 죄목으로 ‘대량 학살’과 함께 ‘반(反)인륜 범죄’를 추가한 것 역시 두 법학자의 노력 덕분이었다.
샌즈 교수의 책은 수십 년 전 저 멀리 떨어진 유럽 땅에서 벌어진 일을 기록하고 있지만 ‘지금, 이곳’을 사는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진다. 우선 번역자인 정철승 변호사가 ‘옮긴이의 말’을 통해 지적했듯 이 땅에 라우터파하트나 렘킨 같은 법률가들이 존재했다면 우리나라도 정치(精緻)한 법 논리로 국제사회를 설득해 일본의 군국주의 지도자들을 처단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씁쓸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아울러 유대인을 말살했던 나치의 만행을 읽다 보면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햇볕 쨍쨍한 대낮에 시민들을 학살한 국가 폭력의 주동자들은 쏟아지는 증언과 자료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인간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린 이들의 행위는 광주 시민, 그리고 우리 국민의 가슴에 오늘도 대못을 박고 있다. 2만8,000원.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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