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 전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전국 요리 경연대회가 열린다. 대회에서 1등을 한 셰프가 바로 일류 식당 주방장으로 스카우트된다. 주인은 거금을 들여 마케팅을 한다. 당연히 전국에서 고객들이 구름같이 몰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다. 손님이 거의 없다. 그나마 한 번 왔던 손님의 재방문율은 제로다. 왜 그럴까. 현자를 찾아가서 물어봤더니 돌아오는 답변은 “주방에는 문제가 없소. 현관을 잘 살펴보시오”다. 과연 현관에 답이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맹견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어디 무서워서 손님들이 감히 들어오겠는가. 손님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다. 중국 철학자 한비자의 저서 ‘한비자’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있었던 일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패션 디자인 거물 여성 바이어가 도착한다. 당연히 직원이 케네디공항에 영접을 나간다. 여행객들의 북적임 속에서 두 사람은 만나는 데 성공한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비즈니스 상담에 들어간다. 사전에 많은 이야기가 오간 후에 만나는 비즈니스 미팅이기에 회사 대표는 협상의 성공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리에 돌아간 거물 바이어로부터 온 e메일의 내용은 협상 결렬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공항에서 있었던 걸까. 이유는 비교적 간단했다. 공항에 영접 나온 직원이 자신의 커다란 여행가방을 차 트렁크에 싣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도 갑질에 해당되지 않는가.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 너무 많은 것을 건 비상식적 비즈니스 행위인가. 아니다. 장맛을 보기 위해 독 안에 있는 장을 다 마셔야 하는가. 그냥 찍어 먹어 보면 다 알 수 있다. 나는 남을 배려하지 않는 편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
다. 억울한 경우가 많다. 내 참뜻은 그렇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곡해할 수 있나 하고 섭섭하게 생각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내 진심이 무엇이든지 그냥 남에게 친절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몇 년 전 우리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초등 1학년인 손자와 아내,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서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반찬인 소시지가 나와서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아내가 갑자기 화를 버럭 내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이 먹을 것도 좀 남겨놓고 먹어야지 마지막 소시지까지 싹 다 먹어버리려고 하면 어떻게 해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차 싶었다. 먹는 거 놓고 싸우는 게 사실 제일 민망한 일이다. 그것도 모범을 보여줘야 할 손자 앞에서. 우리 둘 다 약간 머쓱해 있는데 갑자기 손자가 자기 입에서 우걱우걱 씹고 있던 소시지를 손에 뱉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 어린 것이 자기도 남에게 배려하지 않고 먹었다는 죄책감을 같이 느낀 모양이다. 옛날 양반들이 밥상에 있는 밥과 반찬을 다 먹지 않았다는 아버님 말씀이 문득 생각났다. 우리 셋 다 한참을 웃었다. 친절은 가까운 사람에게도 베풀어야 한다.
일본 도쿄 디즈니랜드에서 있었던 일이다. 노부부가 찾아와서 재미있게 놀았다. 오후 느지막한 시간에 출구 쪽으로 오더니 직원에게 자기 집 주소를 말해주면서 “마지막 전철이 언제까지 있냐”고 물었다. 직원은 친절하게 답변해주었다. 그랬더니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아 그러면 좀 더 놀고 가야겠다”면서 좋아했다. 다음날 다시 그 노부부는 도쿄 디즈니랜드를 찾아왔다. 웬일인가 했더니 택시비를 환불해달라는 것이다. 어제 그 직원이 시간을 잘못 말해줘서 할 수 없이 거금 10만원을 주고 택시를 타고 귀가했어야 했단다. 알고 봤더니 바로 1주일 전 전철 시간표가 변경됐던 것을 직원이 몰라서 발생한 일이었다. 자, 여러분이 도쿄 디즈니랜드 최고경영자(CEO)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쿄 디즈니랜드에서는 그 10만원을 당연히 환불해준다. 직원의 과잉 친절에 따른 손해에 대해 회사는 법적 책임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택시비 환불과 같은 작은 친절이 몇 배, 몇십 배로 회사의 평판을 높일 것이다. 진정성이 담긴 친절은 충분히 남는 장사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