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사이에서의 ‘아이덴티티(정체성)’ 모방 행태가 심각해지고 있다. 사실 패션업계의 카피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공들여 개발한 디자인이 시장에서 인기를 얻으면 곧 모방 제품이 속출된다. 소위 말하듯 ‘히트 친’ 상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원단과 부자재까지 비슷한 제품이 동대문 일대에 깔린다. 그러나 최근에는 단순히 개별 상품의 외형을 모방하는 행위에서 그치지 않고, 해당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통째로 베껴오는 행태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승부하는 디자이너 브랜드의 경우 이 같은 피해에 취약하다. 소규모 디자이너 브랜드의 경우 ‘차별화 전략’에 의해 경쟁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시장에서 성공하는 유일한 방법인데, 정체성이 모방될 경우 치명적인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디자인 모방 피해상담을 진행하는 서울디자인재단 소속 ‘패션엔젤’의 홍은욱 변리사는 “고유의 디자인, 독특한 기능, 고품질·고성능으로 승부하는 작은 브랜드가 차별화가 희석된다면 경쟁우위를 해치고 사업성이 크게 떨어진다”이라며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의 경우 정체성을 정립하고 자리잡기까지 시간이 더 많이 걸릴 수 있으므로, 자리잡기 전에 정체성 카피가 이루어진다면 고유한 색깔이 더 쉽게 퇴색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2016년 한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는 공식 SNS 계정에 “단순한 디자인 모티브가 아닌 수 많은 제품들의 완벽한 카피”를 호소하며 “수많은 에너지와 열정을 쏟은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비양심적인 행태들로 인해서 날아가는 것 같아서 의욕이 상실”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해당 브랜드의 디자인을 카피했다는 의혹을 받는 한 의류 브랜드는 표절 의혹이 불거지자 “비슷한 컨셉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이러한 행태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느슨한 법 조항이 개정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현재 디자인 모방은 저작권법, 디자인보호법, 상표법, 부정경쟁행위방지법 등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부정경쟁행위방지법이란 타인의 상표나 상호 등을 부정하게 사용하는 행위나 타인의 영업비밀을 침해하는 행위를 막는 법이다.
이들 법을 통해 표절행위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디자인 완성 후에 바로 저작권 등록, 디자인등록출원, 상표등록출원 등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 등록에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 매 시즌마다 새로운 디자인을 내놔야 하는 패션업계의 특성상 매번 권리 등록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홍 변리사는 “디자인을 등록하기도 전에 타 업체가 카피해 흔한 디자인이 되어 버린다면 상표권을 확보·유지하더라도 일정 범위 내에서는 권리가 제한될 수 있으며 부정경쟁행위방지권으로 인정받는 것도 어려워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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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특허청은 지난 2017년 12월부터 중소기업의 상품형태를 모방한 업체에 관련 제품의 생산과 판매를 중지하도록 하는 시정권고를 시작했다. 시정권고 시작 이후 1년여 만인 지난 3월까지 부정경쟁행위신고는 100건을 넘어섰다. 이중 절반(47건) 가량이 타인의 상품형태를 모방한 행위였다. 특허청은 “트렌드가 빠르게 변하여 디자인 등록이 쉽지 않은 분야에서 모방행위가 자주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특허청은 신고를 접수 받은 부정경쟁행위 건이 관련법 위반으로 판명 나면 판매중지 등의 시정을 권고하고, 만약 업체가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수사기관에 고발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패션업계에서 고질적인 문제인 디자인 모방을 근절하기엔 실질적인 처벌 수위가 여전히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정경쟁행위법 위반 시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최고형이 부여되나, 실제 내려지는 형량은 훨씬 가볍다. 홍 변리사는 “첫째로 무형 지식재산의 보호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다는 점, 둘째로 지식재산 침해행위는 증명이 매우 어렵다는 점, 셋째로 민사 책임이 이행되면 형사사건에서 정상 참작이 되어 형사처벌 수위가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 등을 그 배경으로 꼽았다. 이 때문에 형사처벌 수위를 높이는 한편, 특허권과 영업비밀에 대해 부분적으로 도입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디자인권이나 상표권까지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화 인턴기자 hbshin120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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