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머물 별궁을 짓는 충성의 대가로 연간 15일의 정기시장과 매주 목요일 주례시장 개설을 허가하노라. 도시에 부과되던 연 18파운드의 세금도 면제한다.’ 1194년 5월2일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가 내린 칙허의 내용이다. 리처드 1세가 포츠머스에 특혜를 베푼 이유는 따로 있다. 첫째는 유럽 대륙을 도모할 전초기지 건설. 리처드는 3차 십자군에서 용맹하게 싸운 자신을 포로로 억류해 몸값을 챙긴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응징을 별렀다. 두 번째 목적은 내치. 원정기간 잉글랜드 왕위를 빼앗은 동생 존 왕을 비롯한 반대파와 싸우려면 ‘관대한 국왕’의 이미지가 필요했다.
리처드의 노림수가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하나 확실한 것이 두 가지 남았다. 포츠머스와 왕실 칙허(Royal Charter). 로마 시대에도 있었다지만 포츠머스는 한촌이었다. 1066년 노르만계 프랑스군을 이끌고 영국을 점령한 윌리엄 1세가 세금 징수를 위해 인구와 토지·삼림·가축까지 조사한 ‘둠스데이북’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다. 리처드 1세가 하사한 칙허는 존 왕을 비롯해 후대 국왕들이 재확인하며 포츠머스는 영국 해군의 근거지로 자리 잡았다. 리처드 1세가 처음 선보인 왕실 칙허 역시 세월의 흐름 속에 권위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리처드 이래 지금까지 하사된 왕실 칙허는 약 1,000건. 4분의3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역사의 흐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국왕에게 충성을 다할 지역에 내려지던 칙허는 식민지 개척 및 무역회사와 대학, 동업자조합(길드), 친목단체로 영역을 넓혀갔다. 미국으로 독립·발전한 북미 식민지나 캐나다, 차와 아편 무역, 세포이전쟁의 배후에는 왕실 칙허로 설립된 회사 또는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림자도 없지 않다. 영국의 특허가 왕실 칙허처럼 까다롭게 운용되는 통에 발명과 특허 경쟁에서 후발국들에 밀렸다.
신경과 전문의 출신인 미국의 투자분석가 윌리엄 번스타인은 대작 ‘부의 탄생’에서 ‘신생 미국의 융성은 간단하고 신속한 특허 제도가 바탕’이라며 ‘영국은 왕실 칙허처럼 까다로운 특허 시스템을 고쳤으나 시기를 놓쳤다’고 봤다. 권위의 벽에 갇혔다는 반성 때문일까. 왕실 칙허를 마케팅에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난다. 물론 순기능도 여전하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입맛에 맞는 보도를 요구하는 정권을 만날 때마다 ‘로열 차터’를 내세운다. 이쯤 되면 로열은 왕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정신의 상징이다. 부럽고 부끄럽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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