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 위기에 내몰린 청년 창업가, 늦깎이 법대생, 60대 요양 보호사, 까칠한 대기업 비서실장…’
나이도, 직업도, 삶의 궤적도 저마다 다른 8명이 법정에 모인다. 법원이 무작위로 선정한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하게 된 이들이다. 과연 이들은 날카로운 추론으로 판사가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15일 개봉하는 영화 ‘배심원들’은 지난 2008년 처음 시행된 국민참여재판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다. 당시 법정의 심판대에 오른 실제 살인 사건을 기반으로 하되 인물과 서사 구조는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다. 홍승완 감독은 장편영화 데뷔작인 이 작품에서 신인답지 않은 안정된 연출력과 또박또박 분명한 어조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뚝심을 보여준다.
영화는 작품의 전반적인 톤을 해칠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분위기가 사뭇 다른 여러 장르를 오가는 화법을 구사한다. 우선 늦깎이 법대생을 제외하면 ‘법(法)’과는 무관한 인물들이 갑자기 사건을 파악하고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전반부는 왁자지껄한 소동극의 형태로 흘러간다. 다양한 인간 군상이 얽히고설켜 각자 주장을 쏟아내는 이 단락은 예기치 않은 유머로 가득하고 배경음악 역시 한껏 과장된 톤으로 코미디의 활기를 돋운다.
‘배심원들’은 약 20시간에 걸쳐 펼쳐지는 선고 공판을 다루는 만큼 대부분의 장면이 법원 안에서 진행된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실내극의 단조로움을 극복하는 것은 재판 과정에서 수시로 끼어드는 ‘플래시백’이다. 감독은 이때 떠들썩한 코미디의 분위기를 벗어던지고 어둡고 음산한 미스터리 스릴러처럼 과거 회상 장면을 연출한다. 변호사와 피고인·검사 등 각자의 시선에 따라 등장하는 플래시백 장면은 물론 사건 당일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적하며 ‘범죄’를 ‘재구성’한다.
사건의 비밀이 드러나고 배심원과 재판부가 영향을 주고받는 결말은 휴먼 감동 드라마의 외양을 취한다. 대충 재판을 끝내고 빨리 집으로, 직장으로 돌아가려는 생각뿐이던 배심원들은 사건의 진실과 마주하면서 잠자고 있던 양심을 깨운다. 판사는 그저 참고사항일 뿐 어떤 강제력도 없는 배심원의 평결을 곱씹으며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을 되새긴다.
신기한 것은 논리적인 각본과 끝내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되는 장면 구성 덕분에 판이한 분위기의 각 단락이 어색함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감독은 국민참여재판의 틀을 빌려 ‘소수 엘리트가 사회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방식이 늘 옳은 것인가’에 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를 통해 ‘법(法)’이란 머리 좋고 똑똑한 엘리트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것을, 언제나 한결같은 물(水)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去) 것임을 일깨운다. 결말에 나오는 판사의 결단은 다소 낭만적인 판타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감독이 보여준 따뜻한 시선과 메시지를 떠올리면 금세 수긍하게 된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서로 다른 장르가 얽히는 이 영화의 중심을 잡는 것은 문소리의 연기다. 그는 강단 있는 말투와 꼿꼿한 몸짓으로 합리적인 원칙주의자이자 온건한 보수주의자인 판사 김준겸 역할을 제대로 연기했다. 윗사람의 말이라도 사리에 맞지 않으면 이의를 제기하고, 한참 어린 사람의 의견이라도 옳은 구석이 있으면 경청하는 김준겸의 태도는 사회적 지위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대다수 관객의 마음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킨다.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