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 단위 숫자 ‘0’을 떼어내 예컨대 1,000원을 1원(혹은 환)으로 변경하는 것이다. 거래상 편의성과 화폐단위당 구매력을 높이는 효과로 매년 논란거리가 됐는데 지난 3월 “논의를 한번 할 때가 됐다”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발언이 논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지난달 이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리디노미네이션 추진 계획이 전혀 없다”고 말을 바꿨지만 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오는 13일 정책토론회를 여는 등 정치권은 논의의 군불을 때고 있는 형국이다. 액면 변경 찬성 측은 세계 경제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격상된 만큼 환율 표시 단위가 변경돼야 하고 리디노미네이션으로 내수부양과 지하경제 양성화에 따른 세수 증대 효과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 측은 액면 변경이 주로 경제위기를 겪는 후진국에서 단행되고 있으며 변경할 경우 불분명한 정치적 의도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국가 경제의 근간을 흔들 것이라고 반박한다. 양측의 견해를 싣는다.
화폐제도는 국가 경제의 기본적 틀의 일부다. 특별한 이유 없이 이를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리디노미네이션, 즉 원화의 단위에서 ‘0’ 몇 개를 지워 새로운 화폐를 채택하자는 주장이 있는데 왜 해야 하는지가 뚜렷하지 않다. 긍정적 효과 없이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이슈라 논의가 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주로 경제위기를 겪는 후진국에서 단행됐다. 물가가 급등하면 기존의 화폐가 쓸모없어지기 때문에 새 돈이 필요하게 된다. 살인적인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이 이어지자 지난해 8월 0을 5개나 지우는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베네수엘라가 좋은 예다. 믿을 만한 공식 통계치가 없어 블룸버그통신은 수도 카라카스의 커피 한 잔값(Cafe Con Leche Inflation Index)을 인플레이션 지수로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초 한 잔에 2.5볼리바르 하던 커피값이 1년 후인 현재 5,000볼리바르로 올랐다. 연율 20만%의 물가 상승이다.
물가가 이렇게 오르면 거래 단위가 폭등해 기존의 화폐가 쓸모없어진다. 몇 달이 넘는 계약이 불가능해지고 정상적 경제활동이 힘들어져 화폐 단위 축소가 불가피하게 된다. 실패한 베네수엘라와 달리 1차 세계대전 직후 패전국 독일의 리디노미네이션은 드물게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예로 교과서에 등장한다. 승전국들에 대한 전쟁 피해 보상, 자국 내 복구와 실업자 지원 등 대규모의 적자지출이 이어졌다. 재원 마련이 어려웠던 정부가 중앙은행의 통화 증발에 의존하며 초인플레이션이 이어졌다. 독일은 1923년 화폐 단위에서 0을 12개나 지우는(1조마르크를 1마르크로 바꾸는)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다. 정부지출을 줄이는 조치와 병행하며 국내외 신뢰를 얻은 결과 독일 경제는 안정됐다.
근래 리디노미네이션 시행국 중 급한 위기 상황이 아닌 경우는 터키였다. 지난 2005년 화폐 단위에서 0을 6개 지웠는데 고질적 물가 앙등이 이유였다. 2000년대 초까지 10년 넘게 연 50%가 넘는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터키리라화의 가치가 빠르게 하락했다. 새 화폐가 도입된 2005년 이후에도 물가가 매년 10% 전후로 올랐고 지난해도 20%를 넘었다. 2005년 미화 1달러당 약 1.4리라였던 환율이 지난해 하반기에는 5리라를 넘어섰고 경제위기 임박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으로 환율 단위를 줄이는 것과 국가신용도 향상은 무관함을 보여준다.
터키는 여론 수렴이 있었고 시행에 앞서 국회의 동의를 거치는 등 절차를 밟아 준비했다. 신(新)터키리라는 2009년 말까지 같이 통용되다 새로 발행된 터키리라화(원래 명칭)로 대체됐다. 하지만 새 리라는 올해 말까지 리라화와의 교환이 가능하도록 했다. 또 2005년 이후 발행된 두 종류의 모든 지폐 권종 전면에 터키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초상이 쓰였다.
우리가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려면 결정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의견 수렴 형식과 국회의 역할, 0을 몇 개 지울 것인지, 새 돈의 이름과 옛 돈이 유통되는 기간, 화폐의 종류와 모양 등을 결정해야 한다. 특히 새 디자인에 들어갈 인물을 선정하는 일은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10여년 전의 고액권 발행 과정은 그 예고편이다. 한은은 2007년 새로 5만원권과 10만원권 발행을 계획했으나 2009년 5만원권만 발행했다. 최종 단계에서 변경된 이유를 두고 언론은 화폐에 백범 김구의 초상화가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액권 두 종류를 둘러싼 사회적 분열 양상만 봐도 이러한데 리디노미네이션을 한다면 어떤 난리법석이 일어날지 예측조차 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5만원권 발행은 10만원권 자기앞수표의 사용을 대체하며 사회적 비용을 크게 줄이는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지난 10년간 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를 밑돌았다. 지금도 10년 전처럼 1억원은 큰 액수이며 거래 단위 폭등에 따른 회계처리의 어려움도 없다. 새 돈이 필요한 경제적 이유는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리디노미네이션을 고집하다면 이는 정치적인 이유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불분명한 정치적 의도로 국가 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은 어떤 때건 위험한 일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경제 사정이 녹록지 않은 때는 더 삼가야 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