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미중 고위급 무역협상이 시작되기 하루 전인 8일(현지시간) 중국이 무역협상을 “파기했다(broke)”는 주장까지 펴며 미중 무역마찰이 일촉즉발의 혼돈 상태로 빠져들었다. 중국에 대해 유례없는 강공을 펴고 나선 데는 중국이 당초 마련된 미국과의 합의안을 번복한 게 주 요인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
9일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 3일 밤늦게 기존 무역 합의 초안을 수정한 150페이지 분량의 문건을 미국에 보냈다. 중국 측이 보낸 수정안은 미국의 핵심 요구사항을 완전히 뒤집는 형태였다는 것이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수정안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중국이 기존 초안에 있던 핵심적인 법률개정 약속을 삭제한 점이다. 애초에 무역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된 중국의 지식재산권 절도와 기술이전 강요를 비롯해 경쟁 정책, 금융서비스에 대한 접근권, 환율 조작 등 모든 핵심 사안에 대한 합의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는 문구를 삭제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 무역 합의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해당 중국 법률 개정이 필수라고 보는 미국 측에 협상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여겨졌다고 로이터 등은 분석했다.
여기에는 중국의 법률·행정시스템을 보는 양국 간의 입장 차이가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합의안이 대부분 완성된 상황에서 미국은 이를 명문화·법제화를 통해 누구나 알고 감시할 수 있게 하라는 데 대해 중국은 정부가 행정조치를 통해 실행하겠다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실제 중국 측 협상단을 이끄는 류허 부총리는 당초 미국에 중국이 행정조치로 합의를 이행할 것을 제안했으나 미국 측의 거부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대표의 요구를 상당 부문 반영한 안을 지난달 베이징에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것이 중국 지도부의 불만을 샀다. 베이징의 한 소식통은 “향후 대미 무역정책에서 중국 정부의 재량권이 거의 없게 되는 합의안에 대해 지도부가 이의를 제기한 듯하다”고 전했다. 중국 지도부는 이번에 협상을 위해 방미한 류 부총리에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특사 칭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그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일단 중국의 법률과 입법시스템을 불신하는 미국으로서는 9일부터 시작되는 협상에서도 중국 정부가 이번 합의를 통해 반드시 개정해야 하는 모든 법률과 행정명령 목록을 합의문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할 방침이다. 입장이 관철되지 않아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높은 관세를 받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이다.
문제는 중국 입장에서도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이다. 중국으로서는 너무 세세한 명문화와 법률화는 중국이 항복했다는 인상을 풍기기 때문이다. 미국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경우 중국 내에서 ‘사회주의체제’의 기간을 흔들고 현행 중상주의적 성장모델을 훼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중국 국무원에 자문하는 한 중국사회과학원 교수는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국유기업에 대한 보조금 철회 같은 미국의 요구는 중국의 발전모델을 해치는 것으로 이를 포기하는 자살행위보다 고율 관세를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상황이 9~10일 워싱턴DC 협상에서 갑자기 바뀔 가능성은 적다. 미국의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미국과 중국이 10일까지 무역협상에서 합의를 이뤄낼 가능성이 10%에 불과하다며 극적 합의를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중국은 협상을 통한 타결을 최우선시하지만 합의가 불발돼 미국이 10일부터 2,000억달러 규모의 제품에 대한 관세를 10%에서 25%로 인상할 경우 동등한 규모의 맞불 관세에 이어 트럼프 정부의 아킬레스건인 농산물과 육류·항공기 등의 구입 중단 및 미 국채 매각카드까지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세 역시 현재 총 1,100억달러어치의 미국산 제품에 대해 각각 5%와 10% 관세를 부과하지만 이를 20%와 25%로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다. 관영 매체들은 “중국은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미국보다 충분한 준비가 돼 있다”며 중국이 강력한 보복에 나설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다만 극적인 타결에 대한 기대감도 일각에서는 제기된다. 스콧 케네디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중국 전문 연구원은 “류 부총리가 단순히 미국에 설교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방미 제안을 수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그가 들고 온 카드에 미중 무역마찰의 향방이 달렸다고 내다봤다. 또한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전면적 확전은 양측이 모두 꺼리는 상황이라 주고받기 식으로 추가관세 등 보복을 한 후 협상이 재연장될 수도 있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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