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브레이크와 액셀을 헷갈릴 수도 있고… 이전에도 아빠 운전에 움찔한 적이 있다고요.”
“다음 갱신 때 면허를 반납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온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 딸과 아들의 말에 78세 아버지의 얼굴엔 진한 서운함이 배어 나온다. 고령 운전을 걱정하는 자녀들과 그런 걱정이 오히려 섭섭한 아버지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가득하던 순간, 딸은 제안을 하나 한다. “아빠, 엄마와 마지막 운전 여행을 가는 건 어때요?”
최근 국내에서 ‘통도사 돌진 사고’로 고령자 운전 사고 문제가 부상한 가운데 일본에서도 지난달 80대 운전자에 의한 교통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도쿄 이케부쿠로에서 87세 운전자가 몰던 과속 차량에 자전거를 타고 가던 모녀가 치여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사고로 아내와 세 살 딸을 잃은 남편은 기자회견을 자처해 호소했다. “조금이라도 불안하다면 운전을 하지 않는 선택지도 생각해주십시오. 가족 중에 운전이 불안한 사람이 있다면 한 번 더 가족들이 생각해주세요.”
일본은 1998년부터 고령 운전자가 면허를 자진 반납하면 대중교통 카드를 제공하는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2008년 2만 9,000만 명이던 자진 반납 건수는 2018년 42만 1,000명으로 늘어났지만, 75세 이상의 반납률은 5.18%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고령 운전자들은 ‘나는 아직 괜찮다’는 판단하에 면허 반납을 꺼리거나 이 같은 제안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NEXCO 동일본에 따르면 ‘운전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은 ‘65~69세’에서 73.5%, ‘70~74세’에서 75 %, ‘75세 이상’에서 79.4 %로 연령이 높을수록 응답률이 높았다. 일본 국민 생활 센터의 ‘초고령 사회와 자동차 교통’ 보고서(2016년)에서도 ‘자신의 운전 기술로 충분히 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운전자는 64세 이하에서는 20% 미만이었으나 65~69세 연령군에서는 29%, 70~74세 군에서는 46%, 75세 이상에서는 53%를 기록해 나이가 많을수록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경시청의 ‘2018년 교통사고 사망 사고 특징 분석’에서는 ‘75세 이상 운전자의 교통사고는 핸들 조작이나 브레이크 실수 등 조작 부적합이 많고, 75세 미만에서는 안전 미확인의 요인이 많았다’고 정리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고령자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비판은 나오고 있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잠재 사고 유발자’로 치부해 면허를 반납하도록 하는 게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가족들도 선뜻 면허 반납을 제안하지 못한다. 여기에 면허 반납 시 자유로운 이동에 제약이 생겨 노년의 사회 활동이 어려워진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대부분 지자체에서 대중교통 카드나 택시 요금 할인 혜택 등을 제공하고 있지만, 기존의 자차 이동과 비교할 때 외출 시 불편함이 크고, 보행이나 자전거 이동에 따른 다른 사고 발생 가능성도 커진다는 지적이다.
20년 넘게 면허 자진 반납 제도를 실시해 온 일본이지만, ‘이동 수단 확보’와 ‘노년 생활의 불편 해소’는 현재 진행형의 과제다. 이에 대중교통 카드 지급 및 운임 할인에 집중됐던 지원책은 점차 운전 적성 상담, 역세권 주택 알선, 역 근처 여행·숙박 시설 할인 등의 서비스로 확대되는 추세다. ‘자동차 없는 생활의 불편함’을 최소화하지 않는 이상 자발적인 면허 반납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러 지원책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운전자의 냉정한 자기 (인지 능력 및 운전 실력) 평가와 이를 기반으로 한 결심이다. 참고로 일본은 최근의 이케부쿠로 사고 이후 고령 운전자를 중심으로 한 면허 반납 건수가 크게 늘었다.
/도쿄=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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