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이 대이란 제재를 복원하며 촉발된 미국과 이란 간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걸프만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미군이 지난 12일(이하 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UAE) 동부 영해 인근에서 발생한 사보타주(고의적 파괴)를 이란 소행으로 판단하면서 양국 간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감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항공모함·전략폭격기를 중동에 배치한 데 이어 10만명 넘는 군대 파병까지 검토한 것으로 드러나며 국제사회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다.
AP통신은 13일 소식통을 인용해 미군이 전날 발생한 사보타주 공격에 대한 초기 조사를 벌인 결과 이란의 소행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날 미국으로 향하던 사우디아라비아 유조선 2척과 노르웨이 국적 선박 1척, UAE의 7개 토후국 중 하나인 샤르자 소속 대형선박 1척이 공격당했다. 미군은 현장조사 결과 이란 혹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대리군이 배 4척에 구멍을 내기 위해 폭발물을 사용했으며 배 흘수선(선체가 물에 잠기는 한계선) 근처에 난 1.5~3m 크기의 구멍이 공격의 흔적이라고 추정했다.
이번 사태를 이란의 도발로 간주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에 경고를 날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이란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가’ ‘정권교체를 추구하는가’라는 등 기자들의 질문에 “(이란이) 무슨 짓을 한다면 엄청나게 고통받을 것”이라며 거친 발언을 쏟아냈다.
이미 미국이 지난해 5월 이란 핵 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에서 탈퇴하면서 양국 간에 군사충돌 우려가 제기됐다. 핵 합의 당사국인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중국 등이 이란과 경제교류를 계속하겠다고 밝히면서 사태 악화를 막았지만 미국이 동맹국에 대한 이란산 원유수입 한시허용 연장을 거부한 것을 계기로 갈등이 또다시 증폭됐다. 이란이 미국의 제재에 반발해 지난달 중동 원유수출의 길목인 호르무즈해협 봉쇄를 경고하고 최근 유럽이 60일 안에 지원책을 내놓지 않으면 고농축 우라늄 생산을 재개할 수 있다고 최후통첩을 하며 미국을 자극한 것이다. 미국은 이에 맞서 전략폭격기를 카타르 공군기지에 배치하고 ‘에이브러햄링컨’ 항공모함을 홍해로 보내는 등 이란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나갔다.
특히 미국이 이란의 도발을 염두에 두고 중동에 대규모 파병까지 검토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무력충돌 우려가 커졌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행정부 관료들을 인용해 패트릭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이 지난 9일 국가안보참모회의에서 이란의 미군 공격과 핵 개발이 발생할 경우 12만명의 병력을 중동에 보내는 방안이 반영된 군사계획을 보고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대이란 강경파인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의 지시를 반영한 것이라고 NYT는 덧붙였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이날 러시아 순방 첫날 일정인 모스크바 방문을 전격 취소하고 브뤼셀을 긴급 방문해 EU 및 핵심국 외교수장들과 이란 문제를 논의했다. 제러미 헌트 영국 외교장관은 이 자리에서 “양측에서 의도하지 않은 긴장이 조성돼 우연히 무력충돌이 발생할 위험성에 대해 매우 우려한다”며 “이란이 핵무기 재개발로 회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창영기자 kc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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