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학사 홍관은 중국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중 송나라 관리 양구와 이혁을 숙소에서 만났다. 홍관이 마침 갖고 있던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 한 첩을 보여주자 두 사람은 “뜻하지 않게 왕희지의 친필을 여기서 보는구나”라며 크게 놀라워했다. 홍관이 “이것은 신라인 김생이 쓴 글씨”라고 거듭 말하는데도 두 사람은 “왕희지를 제외하고 어찌 이 같은 신묘한 글씨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끝내 믿지 않았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이 일화를 보면 김생의 글씨가 어떤 수준인지 짐작이 간다. ‘중국에 왕희지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생이 있다’는 말은 아마도 이 이야기에서 유래됐을 것 같다.
김생(711~?)에 대한 기록은 지금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삼국사기에 ‘어려서부터 글씨에 능해 평생토록 다른 기예는 공부하지 않았다. 나이 80세가 넘어서도 오히려 붓을 잡고 쉬지 않았다’는 정도가 있을 뿐이다. 사실 김생이라는 이름도 확실하지 않다. 김생의 생(生)은 대개 이름을 빼고 성만 부를 때 붙이는 말로 요즘으로 치면 김씨의 씨와 같다. 고려 문인 이규보는 이런 김생의 글씨를 평가해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쓴 ‘동국이상국집’에서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서 글씨를 빼어나게 쓴 네 사람을 일컬어 신품사현으로 칭했다. 그가 골라낸 신품사현은 신라의 김생, 고려의 유신·탄연·최우다. 그는 신품사현 가운데서도 김생의 글씨를 최고로 꼽고 이렇게 평했다. “아침 이슬이 맺히고 저녁 연기가 일어나며 성낸 교룡이 뛰고 신령스러운 봉황이 난다. 마음과 손이 서로 응한 것은 천연의 신비가 붙은 것이다.”
김생은 조선 최고의 명필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에게 영향을 줬다는 주장도 있다. 금석학자 박영돈 선생은 “‘정희수탁본 백월비(낭공대사 백월 서운 스님의 비문을 김정희가 뜬 탁본)’에 ‘정희’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은 추사가 김생의 글씨에 감히 자신의 호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추사체의 모체는 김생”이라고 말했다.
김생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명문이 발견됐다. 불교 고고학을 전공한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은 “경북 김천 청암사 부속 암자인 수도암 약광전 앞 ‘도선국사비’에서 글자 22자를 판독했다”며 “글씨는 김생의 필적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 글씨가 학계의 인정을 받을 경우 김생의 유일한 친필이 된다. 신의 경지에 이른 글씨를 보면 1,300년 전 신라의 숨결과 향기가 느껴질 듯하다. /한기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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