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가 27일 한미정상 통화 내용을 외부에 유출한 주미대사관 소속 K 외교관에 대한 보안심사위원회를 여는 등 본격적인 징계 절차에 돌입했다. 위원장을 맡은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은 “고위공직자로서 있을 수 없는 기강해이, 범법행위라고 판단하고 있다”며 엄중 처리를 예고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지난 24일(현지시간) 파리에서 특파원들을 만나 “커리어 외교관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큰 실망감을 드러낸 데 이어 이날 간부회의에서도 “온정주의를 앞세우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다자외교 시대라고는 하나 여전히 한국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상대국인 대미외교의 신뢰도에 큰 흠집을 낸 사건인 만큼 일벌백계하고 반면교사로 삼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하지만 외교가에서는 이번 사건을 단순히 외교관 한 사람의 일탈이나 그릇된 판단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시각이 만만찮다. 현 정부 들어 누적된 외교관들의 인사 불만과 업무 소외감 등이 결국 대형 외교 참사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단 한 번의 엄중 처벌로 그쳐서는 안 되고 되레 청와대가 외교부 공무원들의 답답한 현실을 들여다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의 한 의원은 “워싱턴이나 북미국에서 일했던 엘리트 외교관들이 현재 한직으로 많이 밀려나 있다”며 “이 때문에 외교부 내에 강 장관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다”고 전했다. 미국·유럽 등 업무 여건이 좋은 공관 근무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곳으로 가는 게 외교부 공관 인사 관행이기는 하지만 관행을 고려하더라도 최근에는 인사가 지나치게 편향적이라는 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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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외교부 안팎에서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전 정권 북미 라인에서 일했던 외교관들이 주요 업무에서 왕왕 배제되면서 노무현 정부 초기 ‘자주파’와 ‘동맹파’ 갈등을 연상시킨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당시 외교부 북미국 간부가 사석에서 노 전 대통령의 대미외교 정책을 비판한 내용이 투서 형식으로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김숙·위성락·조현동 등 북미 라인 핵심 외교관들이 주요 보직에서 줄줄이 배제됐다.
전 정권 북미 라인 홀대뿐 아니라 현 정부 들어 외교를 아예 톱다운 형식으로 끌고 가고 특임 공관장을 늘려 직업 외교관의 설 자리를 줄이고 있는 데 대한 불안감도 외교부 내에 팽배하다. 최근 김도현 주베트남대사와 도경환 주말레이시아 대사가 줄줄이 징계 절차에 올라간 배경에 정부의 무리한 특임 공관장 확대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실무급 외교관들은 선배들의 처지가 정권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을 보며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기도 한다. 본부의 한 서기관급 외교관은 “모두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정말로 일 잘했던 선배들이 밀려나고 갈 곳 없어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솔직히 착잡하다”며 “내 미래일 수도 있다”고 씁쓸해했다. 일각에서는 구겨진 태극기 등 외교부의 잦은 사건 사고들의 배경에 실무급의 사기 저하가 있다고도 말한다.
차관급 출신의 한 외교 소식통은 “우리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여러 상대국의 사정이나 외교정책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게 아니지 않느냐”며 “전 정권에서 열심히 일한 게 외교관에게 주홍글씨가 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 소식통은 “외교관 개개인의 오랜 경험과 인맥이 모두 대한민국 외교의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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