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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동북아 운명 가른 호로관 전투

621년 당나라, 사실상 재통일





고구려 멸망(668년) 47년 전인 621년 5월28일, 중국 하남성 호로관. 대치하고 있던 세 진영의 싸움이 한 세력의 일방적 승리로 싱겁게 끝났다. 수양제가 3차 고수전쟁에서 패배한 613년 시작된 수말당초 군웅할거 시대가 이 전투로 사실상 끝났다. ‘삼국지연의’에서 맹장 여포와 장비·관우·유비 의형제가 겨뤘다는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의 무대이기도 한 호로관에서의 전투는 중국은 물론 우리 민족의 역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승리한 당나라는 중원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자리 잡고 돌궐 등 북방 세력까지 아울렀다. 백제와 고구려도 당이 일으킨 멸망의 회오리로 빨려 들어갔다.

당나라에 앞서 수나라부터 보자. 중원을 270년 만에 통일한 제국이지만 막상 중국사에서는 크게 취급되지 않는다. 사실상 선비족의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존립 기간이 워낙 짧았기 때문이다. 생각과 달리 수나라가 중국에 남긴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겸 작가인 마이클 하트는 ‘랭킹 100: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에서 수문제 양견을 82위로 꼽았다. 여섯 명(공자·채윤·진시황·모택동·맹자)만 포함된 중국인 가운데 순위가 맹자(92위)보다 높다.



수문제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과거제를 정착시키고 양곡 생산이 풍부한 남부와 목축이 발달한 북부를 잇는 운하 공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덕치와 법치, 중앙관제와 균전제, 직전법 등을 시행하고 검약한 천자로도 이름 높았다. 2대 천자 수양제가 무리한 고구려 원정과 사치로 민심을 잃고 결국 부하(을지문덕을 상대했던 우문술의 아들)에게 시해되며 수나라도 망했지만 수문제가 닦은 바탕은 당나라의 융성으로 이어졌다. 당나라 건국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 바로 호로관 전투다.

당의 장수는 천자 이연의 넷째 아들인 이세민. 황화 이북을 통일했던 두건덕과 낙양을 지배하던 왕세충의 연합을 저지하고 두 세력을 차례로 물리쳐 대륙 일통을 향해 탄탄대로를 달렸다. 당태종 이세민이 재위했던 시기(627~649년·연호를 따 정관지치)는 태평성대로 평가받는다. 운하를 사치용으로 쓰던 수양제와 달리 내륙 운송에 활용해 번영을 이끌었다. 대만 역사평론가인 공손책은 ‘승리의 길’에서 중국사를 결정한 10대 전투의 하나로 이세민의 호로관 전투를 꼽았다. 당태종은 ‘정관정요’로 리더십의 모범도 보였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고구려가 존속할 길은 정녕 없었을까. 양만춘의 화살이 좀 더 깊이 박혔다면….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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