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박찬욱·김지운·류승완·최동훈·이창동·허진호…
이들은 한국영화 산업이 급성장하던 2000년 전후에 데뷔했거나 막 이름을 알린 감독들이다. 당시만 해도 서울 충무로 감독의 평균 수명이 매우 짧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들 젊은 연출자가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내놓았어도 얼마나 오래 시장에서 버틸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37세에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로 대박을 터뜨린 박찬욱조차 “임권택 감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연출가는 충무로에서 50세도 되기 전에 퇴출당한다”며 “영화가 큰 성공을 거뒀지만 앞으로 몇 작품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불안감을 토로할 정도였다.
20년이 흐른 지금 신기하게도 이들은 어떤 젊은 감독들보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00년대 전후 빛나는 가능성을 내비쳤던 이들은 이제 한국영화의 당당한 주류로 성장해 ‘K-무비’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어느덧 50~60대에 이른 주류 감독들이 ‘거장’ 칭호를 받으며 여전히 식지 않은 열정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데 반해 가장 싱싱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뽐내야 할 30~40대 감독의 존재감은 선배들과 비교해 한참 떨어진다. 20년 만에 갑자기 감독들의 평균 수명은 늘어난 반면 ‘허리층’이 엷어진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한국영화계가 대형 투자·배급사 위주로 재편되면서 작품 기획 단계부터 엄격한 관리 체계가 갖춰진 것을 핵심 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신인급 감독들은 모험적인 시도를 담은 시나리오를 써도 대중성을 고려한 투자·배급사의 입맛에 따라 재조정되면서 뻔한 공식을 답습하는 평범한 작품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반면 오랜 세월 쌓은 이름값을 통해 간섭에서 자유로운 환경을 조성한 주류 감독들은 독특하고 새로운 영화를 꾸준히 내놓으면서 입지를 더욱 공고히 다지고 있다.
◇감독 수명 길어졌지만… 신인 육성은 ‘뒷전’인 제작 시스템=한국영화계의 산업 풍토는 2000년대 초중반 이후 급격히 바뀌었다. 충무로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제작사는 강남과 경기도 파주 등지로 흩어졌다. 대신 CJ·롯데·쇼박스·NEW 등 대형 투자·배급사들이 영화계를 장악했다. 특히 CJ와 롯데는 전국을 아우르는 극장 체인까지 갖추고 ‘제작-투자·배급-상영’으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투자·배급사의 영향력이 점점 확대되면서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는 창작자의 입김이 축소됐다는 사실이다. 문화 상품과 무관한 여타 분야의 대기업 선진 시스템을 그대로 도입한 이들 회사는 검증되지 않은 신인급 감독 작품의 투자·배급을 맡을 경우 ‘위험성’은 줄이고 ‘상업성’은 높이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시나리오 수정을 요구한 다음에야 제작에 착수하는 공정 체계를 확립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형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회사 직원들이 관객의 성향을 면밀하게 분석한 데이터를 참조하면서 각자 시나리오를 읽고 의견을 내는 과정을 반복한다”며 “결국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를 만들어 수익을 내는 가능성을 높이는 절차”라고 설명했다. 김영진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는 “뭔가 낯설고 뾰족하게 모가 나 있는 듯한 대목은 다수 대중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방향으로 깎여버리는 경우가 대다수”라며 “약 20년 전 만들어진 신인 감독의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이나 ‘지구를 지켜라!’ 같은 영화가 과연 지금의 한국영화계 풍토 안에서라면 제작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투자·배급사가 작품 개발 단계부터 깊숙이 개입하는 일 자체를 비판하기는 힘들다. 영화는 골방에 홀로 틀어박혀 만드는 예술 장르가 아니며 문학·미술·전시 등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대중성 확보를 최우선적인 목표로 제작 시스템이 굴러가고 있음에도 한국영화계의 수익성은 신통치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국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12~2017년 4.0~18.3% 수준을 맴돌던 한국 상업영화의 평균 추정 수익률은 지난해 -17.3%로 뚝 떨어졌다. 영진위 관계자는 “제작 여건 개선과 인건비 상승의 영향도 있으나 관습적인 흥행 코드를 나열한 젊은 감독들의 상업영화들이 대중의 외면을 받은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반면 한국영화계를 쥐락펴락하는 50~60대 주류 감독들은 지금도 자유로운 창작 환경 속에서 영화를 찍으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박찬욱의 ‘아가씨’는 칸국제영화제 경쟁작에 초청될 만큼 독창적인 미학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국내 개봉 후에도 42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품은 봉준호의 신작 ‘기생충’ 역시 벌써 대박 조짐을 보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50~60대 주류 감독을 위협할 만큼의 예술적 재능과 상업적 저력을 겸비한 40대 감독은 ‘범죄와의 전쟁’ ‘공작’의 윤종빈, ‘황해’ ‘곡성’의 나홍진, ‘우아한 세계’ ‘관상’의 한재림, ‘택시운전사’의 장훈 정도 외에는 많지 않은 상황이다. ‘부산행’으로 단숨에 주목받는 젊은 감독으로 부상한 연상호는 최근작인 ‘염력’이 흥행·비평 양면에서 실패하면서 경력에 큰 상처를 입었다. 류승완·최동훈은 40대 중후반이지만 데뷔 시기가 빨라 이들 감독보다 선배 세대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대기업 특유의 효율성 높은 선진 체계는 유지하되 제작 시스템의 개혁을 통해 젊은 감독들의 모험적인 시도가 한국영화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 교수는 “투자자가 제작 전반을 주도하면서 감독을 기능적인 연출자 정도로 여기는 관행 속에서 2000년대 초중반의 창의적인 활력이 뿜어져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며 “미학적 정체 상태를 보이는 한국영화계에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충고했다.
◇‘소포모어 징크스는 없다’ 두 번째 연출 나서는 신인 감독들=충무로가 첫 번째 작품에서 흥행 성공의 단맛을 봤거나 특별한 감각을 뽐낸 신인 감독의 차기작에 주목하는 것도 영화계가 처한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허리층이 빈약한 상황에서 어렵게 수혈된 ‘젊은 피’들이 꾸준히 연출 기회를 잡으며 대중과 만난다면 한국영화계의 스펙트럼도 한층 풍성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2017년 데뷔작 ‘범죄도시’로 680만 관객의 선택을 받은 강윤성 감독은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을 들고 돌아온다. 내달 19일 개봉하는 이 영화는 거대 조직의 보스가 개과천선을 하고 국회의원 출마까지 하는 이야기를 그린 액션 드라마다. 관객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쫄깃쫄깃한 연출 감각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할지 주목된다.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올여름 시장 공략의 첨병으로 밀고 있는 ‘사자’도 영화계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신인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2017년 ‘청년경찰’로 의외의 흥행 성공을 거둔 김주환 감독은 배우 박서준·안성기와 함께 종교적인 색채가 가미된 공포 영화를 만들었다. 격투기 챔피언과 사제의 교감을 그린 이 작품은 오는 7월 개봉한다.
2010년 ‘파수꾼’으로 국내외 영화제를 휩쓴 윤성현 감독은 9년 만에 스릴러 장르의 상업영화인 ‘사냥의 시간’으로 극장가를 찾는다. ‘기생충’의 최우식과 ‘건축학개론’의 이제훈이 주연을 맡았으며 개봉 일자는 미정이다.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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