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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동로마제국 멸망의 전조

1345년 독재자 아포카오쿠스 피살

터키 이스탄불 전차경기장 자리에 서 있는 비잔틴제국 당시 유적들.




1345년 6월11일, 비잔틴제국의 실권자 알렉시우스 아포카우쿠스가 죽었다. 추정 나이 40대 후반. 포퓰리즘, 즉 대중 인기 영합 정책으로 권력을 다진 그는 독재 기반이 흔들리자 강경책으로 나갔다. 불안해 호위병 수백 명을 붙이고 늘어나는 반대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의 궁전을 감옥으로 개조하려던 그는 감옥 시설 확충 공사에서 죄수들에게 칼을 맞았다. 평민 출신인 그는 권신이며 몇 살 위인 칸타쿠제누스의 측근이었으나 배반한 인물. 아포카우쿠스의 죽음으로 비잔틴제국의 권력 구도는 옛 상관 쪽으로 기울었다.

칸타쿠제누스는 친구이며 황제인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충성을 다했던 인물. 전임 황제의 생전부터 공동황제직을 제의받았으나 고사한 칸타쿠제누스가 권좌에 오르기를 마다하자 아포카우쿠스는 다른 마음을 먹었다. 망설이는 주군 칸타쿠제누스를 배반하고 황후와 어린 황제(요하네스 5세)의 편에 붙은 아포카우쿠스는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기는 반(反)귀족 정책. 영국 외교관 출신의 비잔틴 역사학자인 존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에 따르면 당시 제국은 부정부패와 양극화가 극에 달한 상황.



제국의 힘이 약해지며 변방이 무너져 수많은 난민이 몰려든 콘스탄티노플의 경제는 갈수록 나빠졌다. 부유층은 병역도 세금도 마다하고 부정축재에만 열을 올렸다. 아포카우쿠스는 이를 최대한 악용했다. 옛 주군인 칸타쿠제누스의 집을 민중이 약탈하도록 일을 꾸몄다. 마침 군단병들의 옹위로 황제직을 선언했던 칸타쿠제누스의 집에서 온갖 금은보화가 발견되자 민중은 더더욱 귀족층에 등을 돌렸다. 민중의 갈증을 해소해주며 권력을 움켜잡은 아포카우쿠스가 죄수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권력은 2년 뒤 칸타쿠제누스에게 돌아갔으나 끝이 아니었다. 끝없는 내분과 갈등, 귀족과 평민의 갈등 속에 제국은 1453년 멸망에 이르렀다.

에드워드 기번은 대작 ‘로마제국 흥망사’에서 내분을 동로마의 멸망 원인으로 꼽았다. 권력을 향한 두 세력의 인기 영합 정책,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물론 오스만튀르크까지 끌어들인 외세 의존이 멸망을 불렀다는 것이다. 민중은 책임이 없을까. 해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생각 없이 목소리를 높이고 폭력 행위에 가담하는 ‘폭민(暴民)’이 사회를 붕괴시키는 요인이라고 봤다.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비잔틴제국이 이렇게 무너졌다. 경제력 약화와 양극화, 외세 의존과 사유하지 않는 민중의 단순 폭력성이 결합한 결과는 참혹하다. 남의 일 같지 않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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