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옥을 좋아한다. 아니 그리워한다. 한옥을 그리워하는 것은 비움의 미학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한옥에는 큰 마당이 있었다. 한옥의 마당은 마치 한국화의 여백의 미학처럼 그 자체로 쉼을 선물했다. 그러면서 계절마다 제격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자연을 넉넉하게 품었다.
또한 마당은 집에 사는 사람들을 중재해주고 사이좋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문 닫는 소리나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가족의 기분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옥에서의 마당은 완전히 비어 있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가장 강력하게 채워져 있는 공간이었다.
비움은 동양사상의 큰 가르침 가운데 하나이며 도달하기 가장 힘든 이상적 상태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 空手去)’로 잠시 왔다가 떠나는 게 인생사이겠지만 진정한 채움은 ‘의도적 비움’을 통해 나올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쌓은 경험·연륜이 언제나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이 그 당시에는 타당했더라도 그것을 둘러싼 맥락이 바뀌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때도 있고 요즘처럼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에는 끊임없이 배우지 않는 사람의 오래된 경험은 때로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현재의 문제에 과거의 해법을 제시하고 우기는 것은 젊은 세대들에게 ‘꼰대’로 비칠 개연성이 크다는 것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삶의 가치와 진로로 인해 많은 고민을 했던 대학 시절 내가 찾은 한 글귀는 ‘허무를 인정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라’는 묵직한 가르침을 줬다. 삶이 고통이며 위로받을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의 충분한 경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나의 깨달음은 세상에 대한 충분한 경험의 결과라기보다는 아주 강렬하게 경험한 결과였다. 그래서 번민과 불안으로 힘들었던 20대에 얻게 된 그 깨달음의 끝은 다소 공허했다. 하지만 삶이 본질적으로 고통과 환희의 순환이라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갈 때 비로소 삶이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 정해진 경우가 있다. 연꽃이 피는 것을 보기 좋은 시간이 새벽인 것처럼 6월은 지나간 6개월을 돌아보고 남아 있는 6개월을 위해 새롭게 다짐하기 참 좋은 시간이다. 설령 새해에 결심했던 일이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 실패 덕분에 우리는 끊임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 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더디지만 하루하루 성실한 삶, 그것이야말로 언젠가 피는 꽃이 된다는 사실이다. 더 늦기 전에 비우고 배우며 품위 있게 나이 들어가는 법을 좀 더 익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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