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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1830년 프랑스 알제리 침공

샤를 10세 해외 원정 감행





1830년 6월14일 중무장한 프랑스군이 알제리 땅에 들어섰다. 상륙한 병력은 소수였으나 대규모의 원정군이 뒤에 있었다. 침공군 병력 3만7,612명에 전투함 103척, 수송선 464척이 알제리 해안을 메웠다. 마르세유를 출항한 원정군 함대가 얼마나 많았던지 전 함선이 합류하는 데 보름이 걸렸다. 알제리는 오스만튀르크의 속령이면서도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며 번영하던 지역. 노예무역을 중계하고 해적 선단을 운영해 부를 쌓았다. 프랑스는 해적 집단 소탕을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속셈은 달랐다. 1827년 즉위한 샤를 10세는 국내의 불만을 해외로 돌리고 싶었다. 구체제로 회귀하는 보수반동 정치로 신흥자본가들의 원성을 사자 알제리 침공을 저질렀다. 경제적 이해 다툼 속에 터진 감정 싸움도 침공의 배경이었다. 먼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당시 대량의 의복 등을 팔았으나 대금을 받지 못한 알제리 거주 유대상인들이 제기한 채무 변제를 놓고 사건이 하나 생겼다. 프랑스 대사가 채무 변제를 거절하자 알제리의 실권자가 부채로 뺨을 때린 것. 격분한 프랑스는 3년간 알제리 해안을 봉쇄하다 전면 침공에 나섰다.



프랑스 본국에서 7월혁명이 발생해 샤를 10세가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는 소동 속에서도 프랑스군은 두 달 만에 대부분의 거점 점령을 마쳤다. 프랑스는 마음 놓고 알제리를 휘저었다. 알제리는 한때 지중해와 대서양 연안을 주름잡으며 유럽 선박을 나포하거나 통행세를 갈취하는 해적의 본거지로 악명이 높았지만 신생 미국 해군에 패전(1815년)한 뒤 예전의 힘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속절없이 당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식민지가 아닌 영토로 여기고 3개 주로 분할해 주지사를 내려보냈다.

프랑스가 1962년까지 영토로 거느린 알제리에서는 독립전쟁에서만 150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는 요즘 거꾸로 자국 내에 거주하는 알제리 출신들의 테러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강제 추방하자는 극우단체도 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아프리카계의 대부분은 허드렛일을 위해 끌려간 사람들의 후손이다. 페니키아와 카르타고가 터전을 잡았고 로마제국을 거쳐 프랑스에 예속당했던 알제리는 경제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한반도보다 10배 크다는 국토에는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지하자원이 많단다. 유명한 인물도 있다. 소설가 알베르 카뮈(외할아버지가 알제리인)의 고향이며 축구 감독 지네딘 지단의 모국이 알제리다. 로마 시대 기독교 신학을 집대성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알제리 태생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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