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대규모 시위로 표출된 민심 앞에 홍콩 정부가 결국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추진을 전격 보류하기로 했다. 시위 격화와 유혈사태 확산으로 인한 정치적·경제적 리스크에 더해 홍콩이 미중 무역전쟁에 이은 또 하나의 미중 격돌의 장으로 변하는 데 따른 부담 등이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홍콩 정부는 어디까지나 법안 보류일 뿐 철회는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격렬한 시위에 아랑곳없이 법안 추진 강행 의사를 밝혔던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사실상 100만 시위대에 ‘백기’를 들면서 그의 정국 장악력이 치명상을 입게 됐다. 당장 홍콩 시민들은 송환법 보류에도 불구하고 16일 람 행정장관 퇴진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걸며 최대 200만명이 집결한 대규모 시위를 이어갔다.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중국에 대한 국제 여론이 악화하고 홍콩 내 반중(反中) 물결이 거세지면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또한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됐다.
람 행정장관은 지난 15일(현지시간)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송환법 추진 보류’를 발표한 데 이어 16일 오후에는 처음으로 공식 사과 표명을 했다. 앞서 12일 수만명이 참여해 격렬하게 벌인 시위 이후에도 법안 강행 의사를 굽히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급격한 태세 전환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이 같은 급반전의 배경으로 중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익명의 소식통에 따르면 람 행정장관은 홍콩 사무를 관장하는 공산당 정치국 상임위원이자 공산당 서열 7위인 한정과 만난 뒤 송환법 무기 연기를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이 송환법 무기 연기를 용인한 데는 ‘톈안먼 트라우마’가 한몫한 것으로 해석된다. 들끓는 홍콩 민심을 무시한 채 강압적으로 법안을 처리할 경우 1989년 6월4일 중국 대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를 인민해방군의 탱크와 장갑차가 유혈 진압한 톈안먼 사건이 30여년 만에 홍콩에서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시위 격화로 가뜩이나 서구의 비난을 사고 있는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심각한 이미지 훼손을 겪게 된다.
무엇보다 미국과의 무역전쟁에 전력을 쏟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홍콩에 또 하나의 전장이 생기는 데 큰 부담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미중 정상은 오는 28~29일 G20 회의가 열리는 일본 오사카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무역협상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의 앞날을 좌우할 이 협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장애 요소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홍콩 시위를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는 게 SCMP의 분석이다.
람 장관을 포함한 현 홍콩 집권층의 지지 기반인 친중파와 재계에서 처리 강행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며 ‘대화론’에 무게가 실린 것이 극적 반전을 이루는 데 일조했다는 해석도 있다. 로이터통신은 “이미 홍콩 재벌 다수는 금융 거점을 싱가포르로 옮겨가기 시작했다”며 “이렇게 홍콩 재벌과 외국인 투자가가 홍콩 시장을 등지게 되면 동아시아 금융 중심이라는 홍콩의 지위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만 법안 처리가 무기한 연기됐음에도 홍콩의 내홍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날 검은 옷을 입고 빅토리아공원에 모여든 시위대는 송환법 보류가 아닌 완전한 철폐를 요구하며 ‘검은 대행진’을 이어갔다. 이날 집회를 주도한 재야단체 연합 민간인권전선에 따르면 시위에 참가자는 최대 200만 명에 달한다. 이는 지난 9일 사상 최대 규모로 열린 집회 인원(103만 명·주최 측 추산)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다.
결국 분노한 홍콩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는 람 장관의 공개사과를 끌어냈다. 그는 이날 오후 8시 30분께 성명을 내고 “정부 업무에 부족함이 있었음을 인정한다”고 사과했다. 송환법 반대 운동이 시작되고 나서 람 장관이 이처럼 시민들에게 직접 사과 메시지를 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가 공개사과에 나선 것은 2주째 초대형 송환법 반대 시위가 이어지고 전날 고공시위를 벌이던 송환법 반대 시민이 추락해 사망한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민심이 더욱 악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중국은 송환법 추진 보류 결정을 지지하면서도 여전히 이 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5일 담화에서 “홍콩은 중국의 특별행정구이며 홍콩의 일은 중국 내정에 속하므로 그 어떤 국가나 조직·개인이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외부 간섭을 경계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내년 홍콩 입법회 선거가 예정돼 있는 만큼 송환법을 섣불리 재추진하다 분노한 시민의 ‘심판’을 받을까 우려하는 친중파 의원들이 법안 추진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며 법안이 자연 소멸할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현 홍콩 입법회 의원의 임기가 내년 7월 끝나기 때문에 이 기간 내에 법안이 재추진되지 않으면 법안은 ‘자연사’하게 된다. /김민정기자 je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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