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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준법서약





“제 소원은 양단된 조국이 하루속히 통일되는 것입니다.” 1995년 8월15일 45년 만에 감옥생활에서 풀려난 김선명씨는 대전교도소 앞에서 이렇게 석방 소감을 밝혔다. 그가 장기수로 유명한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보다 18년이나 더 오래 감옥생활을 한 것은 전향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전향’이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왔다. 1920년대 ‘천황제’를 부인하는 사람을 잡아들여 잘못된 사상을 버리면 형량을 줄여주던 것이 일본 강점기에 도입돼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는 빌미가 됐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에서는 없어진 전향이 한국에서는 광복 후에도 그대로 살아남았다. 전향은 이승만 대통령 때인 1956년 법제화돼 김영삼 정부 때까지 유지됐다. 우리나라는 일본 강점기부터 좌우로 나뉘어 독립운동을 해온데다 1950년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치면서 이념 갈등이 심했다. 적어도 남한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신념으로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였다. 남한에서 전향은 시민으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자세가 돼 있는지를 파악하는 잣대가 됐고 이를 거부한 비전향자는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향이 없어진 것은 1998년 김대중 정부 때다. 이때만 해도 사회 일부의 반발을 우려해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고 준법서약으로 대체했다. 전향이 기존 사상에 대한 자아비판, 체제에 대한 충성 등을 요구한 것과 달리 준법서약은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을 준수한다는 기본적인 내용만 담으면 됐다. 하지만 이 역시 인권침해라는 비판을 받으며 양심수를 계속 만들어냈다. 준법서약은 2003년이 돼서야 공식 폐지됐지만 100% 사라지지는 않았다. 보안관찰 대상자가 보안관찰 처분 면제를 신청할 때 제출하는 서류에는 여전히 준법서약서가 있었다. 보안관찰은 국가보안법 위반과 내란음모 등 사상범의 재범을 방지하고 사회복귀를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사상범의 활동내역과 여행지 등을 거주지 관할 경찰서에 주기적으로 신고하도록 한 제도다.



법무부가 준법서약서를 없애는 내용의 보안관찰법 시행령 개정안을 18일 입법 예고했다. “신고의무가 주거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이 많았고 이 때문에 보안관찰 대상자가 면제 신청을 꺼리는 경우가 있었다”는 게 법무부의 설명이다. 우리 사회에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 논란을 일으킨 제도가 없어지는 데 무려 90여년이 걸린 셈이다. /한기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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