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죽음을 선배로부터 처음 접했을 때 내가 꺼낸 첫 마디는 “왜요?”였다. 믿을 수도, 믿기도 힘든 부고기사를 데스킹하는 내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곳에나 있되 있지 않은 배우였다. 조연의 역할을 그보다 훌륭히 소화해내는 배우는 없었다. 모두가 다 튀어보이려는 배우들의 본능적 경쟁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주연을 더 빛나보이게 하는, 그녀는 밑반찬 같은 배우였다.
그중에서도 그녀는 꼭 김치같은 사람이었다. 배추김치, 무김치, 열무김치, 물김치. 없어도 되지만, 막상 모두 없으면 허전한. 그녀의 연기는 감칠맛보다는 수수한 맛이 났다. 혹시나 독특한 역할이 주어지면 오히려 거북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평범한 우리의 모습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연극과 뮤지컬을 오랫동안 취재하며 연기를 잘 하는 배우들에게 ‘인물의 옷을 입었다’고 표현해왔다. 그 생각을 갖게 해준 이가 10여년 전 영화 ‘연애’ 속의 전미선이었다.
대학생 시절 조조로 찾은 영화관에서 홀로 그 영화를 봤던 날을 잊지 못한다. 객석 한가운데 혼자 앉아있는 내 앞에서 그녀는 한편의 연극에서와 같은 묵직한 연기로 스크린에 빨려들어가게 만들었다. 빚에 쪼들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여린 여자의 고통, 그 날것의 느낌이 오늘까지도 생생하다.
한번쯤 만나 묻고 싶었다. 당신 연기의 원천이 무엇이냐고. 그러나 단 한번도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부지런하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인연이 안 닿았을 뿐, 때를 못 맞췄을 뿐, 그녀보다 먼저 인터뷰해야 할 주연이 많았을 뿐. 모두 변명이다. 문화와 연예 부서를 도는 수년간 나는 단 한번도 그녀를 일부러 찾지 않았다.
너무 늦어버린 뒤에 생각해본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너무나도 옆집 아줌마 같던 그녀가 보여준 연기의 근원은 바로 그 자신의 삶 아니었겠냐고. 수년간 우울증을 앓아왔다는 발표가 사람들의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연기에서 전미선의 삶을 봤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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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은지도 한참이 흘렀다. 많은 동료들이 빈소에 와서 울었다고 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추모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한번도 팬이라고 생각해본적 없으나 사실 팬이었던 이들의 울컥한 마음이 또다른 숨겨진 팬들을 모았고,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번졌다.
그들과 슬픔을 나누면서도 꼭 한번 ‘당신 연기의 원천’을 파고들어볼걸 하는 직업적, 아니 개인적 아쉬움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 괴롭기까지 하다.
그녀만큼 보통사람을 잘 표현하는 배우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도무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저 이제는 좋은 곳에서 편안하길, 남은 질문은 기다렸다가 먼 훗날 처음 만나 단독 인터뷰에서 꺼낼 수 있길 바랄 뿐. 고인의 명복을 빈다.
/최상진기자 csj845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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