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문재인 대통령 다음으로 유명한 박지원입니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 한 방송에 출연해 자기를 표현한 말이다. 실제로 현역 국회의원 가운데 가장 유명세를 떨치는 정치인을 뽑는다면 박 의원을 빼놓을 수 없다. 공중파, 종합편성채널, 라디오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그는 섭외 1순위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맥을 잘 짚는데다 웬만한 젊은 정치인들보다 위트 넘치고 감각적이다.
노장의 정치인에게는 꿈이 있었다. ‘야당 원내총무(원내대표).’ 어린 시절 책상 위에 써 붙여 놓았던 장래희망을 그는 한 번도 아닌 세 번이나 이뤘다. 다시 그는 꿈을 꾸고 있다. 이번에는 ‘초대 평양주재 한국대사’다. 지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실무 주역으로서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시켰고 지난해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는 유일하게 초대된 이가 박 의원이다. 이후 박 의원은 평양 남북정상회담에도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다녀왔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 당시 북한이 조화와 함께 공개적으로 보내온 편지의 수신자는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과 박 의원이었다. 남북의 가교역할에서 박 의원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박 의원 의원회관 사무실 호수는 ‘615호’다. 끝까지 남북 화해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32년 정치인생 가운데 대표적인 ‘희로애락’을 물었더니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남북 화해와 평화가 등장했다.
◇희(喜)=올해 77세로 간난신고를 겪어온 박 의원에게 가장 기쁜 순간은 언제나 ‘지금’이다. 어린 시절 꿈이었던 원내대표 당선이나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던 일도 아니었다. “인생과 정치 모두 생활 자체가 희로애락의 연속이 아닌가요. 그래서 지금 가장 기쁜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요즘은 여섯 살 손자를 보는 재미가 가장 기쁜 일입니다.” 손자 앞에는 ‘정치 9단’도 무장해제가 되는지 손자 이야기를 하는 그는 영락없는 ‘손자 바보’였다. 그러다가도 남북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다시 정치인 박지원으로 돌아왔다. 정치 전망을 말할 때는 눈매가 달라졌다.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 정치에서 그의 레이더망은 예리하고 정확했다. 얼마 전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 역시 적중했다. 다음 북미정상회담은 언제쯤으로 예상하는지 묻자 그는 단호하게 “오는 9월 전에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약속대로 영변 폐기 플러스알파까지 하면 미국에 굉장히 큰 의미가 있어요. 이렇게 되면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이 재개되고 원유수입 제한까지도 풀어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이같이 예측하면서 “이렇게 되면 최소한 9월께는 유엔총회장에 김 위원장이 나가서 연설하고 또 북미정상회담·남북미정상회담, 나중에는 중국까지 합쳐서 4개국 정상이 평화협정까지 이루지 않을까 싶다”고 내다봤다.
◇노(怒)=박 의원은 자신이 성질이 급해 화를 잘 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선거 과정에서 경쟁 후보자들의 지나친 마타도어나 정치 공방은 다 잊었다고 했다. 다만 보수와 진보가 각기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 데 분노했다. 그는 “보수와 진보는 상호 간에 이해하면서 합치점을 찾아야 한다”며 최근 북한 목선의 삼척항 귀순 문제를 예로 들었다. “북한 어선의 귀순 문제가 매끄럽지 못했던 것은 진보가 실수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일을 처리하면 감동적이었을 거예요. 현 정부가 대북 유화책을 쓰면서도 안보에서는 단호한 상식을 지켰어야 했는데 못했어요. 진보는 대북 유화정책에도 안보는 강하게 해요. 보수는 또 국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죠. 그런 상식이 지켜지지 않을 때 화가 나는 겁니다.”
박 의원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를 본격화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경기도 부천 소사에 출마했지만 당시 경쟁후보인 김문수 신한국당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당시 김 후보는 여당 후보의 유리한 위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박 의원을 압박했다. 사적인 가족관계 문제를 겨냥하기도 해 화가 났을 만도 했지만 박 의원은 “다 잊었다. 가슴에 품고 살면 되겠느냐”며 “대북송금 사건도 다 잊었다”고 말했다. 대북송금 사건은 국민의 정부 말기인 2002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불거졌다. 당시 2000년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우리 정부가 북한에 4억달러를 부당하게 지원했다는 의혹을 전한 외신보도가 발단이 됐고 참여정부가 야당이던 한나라당의 대북송금 사건 규명을 위한 특검 실시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수사가 진행돼 박 의원은 수감됐다. 박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에 “너나 내가 목숨 바쳐 했던 대북정책을 이어가는 건 노무현 전 대통령이지 않냐”며 “‘우리 대통령’이라고 말씀하신 뒤로 한 번도 누구를 원망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애(哀)=올해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다. 본래 예정된 인터뷰 당일 이희호 여사도 별세했다. 그리고 지난해 부인상까지 당한 박 의원은 “저랑 가장 밀접하고, 가르침을 줬고, 가장 의지했던 세 분이 모두 돌아가셨다”며 “김홍일 전 의원까지 그렇게 되다 보니 슬픔보다 멍하게 무중력 상태가 됐다”고 말했다. 슬픔은 그의 몸에 이상 징후를 일으켰다. “아내를 잃은 다음 돌발성 난청이 왔고 눈도 충격이 와서 스테로이드 치료를 강하게 받게 됐어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몸무게가 6㎏ 늘어 요즘은 걷기도 힘들지만 관리를 하면서 개선되고 있어요. 정신적 충격이 몸으로 오더라고요.”
박 의원은 고교 졸업 후 광주중앙입시학원에서 재수를 하다가 부인을 만났다. 한눈에 반했다. 둘 다 광주교대에 입학했지만 박 의원의 부인은 초등학교 선생님하고는 결혼할 수 없다며 ‘큰일’을 위해 서울로 올라갈 것을 권유했다. 이어 그는 단국대 상학과에 다시 진학해 대학 졸업 후 대기업을 다니다가 30대 초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가발과 잡화를 수입·도매하는 회사를 세워 성공하고 뉴욕 한인회장을 맡았다. 미주 지역 총연합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이때 김대중 당시 야당 지도자와 인연을 맺어 1992년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후 4년간 야당 대변인으로 명성을 날리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그는 최장수 대변인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공보수석비서관을 거쳐 문화관광부 장관을 맡았다. 영원한 DJ맨의 탄생이었다. 결국 부인이 없었다면 정치인 박지원도 없었던 셈이다. 그랬던 그가 아내에게는 “너를 팔아서라도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했으니 사별 이후 ‘고마워. 미안했고, 잘못했고, 사랑해’라는 책을 펴내고 사부곡(思婦曲)을 부를 만도 했다.
◇낙(樂)=그만큼 박 의원의 삶에서 아내의 존재감은 컸다. 가장 즐거운 순간도 아내와의 결혼이었지만 그 못지않은 운명적 조우도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를 만나서 사랑받고 은혜받은 게 즐거운 순간이었죠.” 박 의원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전남 목포에서 당선됐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박 실장이 당선돼서 다행이라며 홍업이가 당선됐으면 국민들이 뭐라 했겠느냐고 하셨어요.” 당시 총선에서 김 전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 전 의원도 무안·신안 지역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공천에서 탈락해 민주당 아성 지역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돌아온 박 의원에게 김 전 대통령은 ‘호남 대변인’을 당부했다. 박 의원의 트레이드 마크인 ‘금귀월래(金歸月來·금요일에 지역구로 내려갔다가 월요일에 서울 여의도 국회로 돌아오라는 말)’도 이때 나왔다. “1년 52주 중 50주는 금귀월래 하라 하셨어요. 12년 국회의원을 하면서도 사드 문제나 일본 외교 문제 등으로 해외에 나간 두 번을 제외하고 금귀월래는 꼭 지키고 있습니다. 첫째 당부는 지역구를 잘 챙기고 둘째는 의정활동 등 중앙정치를 또 잘하라고도 하셨어요. 셋째는 공개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게 호남 대변인이죠.” 지금 그에게는 호남의 의석수를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된 호남 지역은 농어촌이 많아요. 의석수를 줄이는 방식의 선거제 개편은 농어촌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 수 있어 국민적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의석수 30석을 늘리자고 했어요. 호남을 대변하기 위해서였죠.”
이희호 여사는 김 전 대통령보다 박 의원을 더욱 인정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박 의원을 향해 대놓고 ‘대통령’을 하라고 권했다고 했다. 박 의원은 이 여사가 자신에게 “김 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보다 젊고 건강하지 않느냐”면서 행운을 빌었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에 나온 대통령 발언에 돌발 질문을 던졌다. 대통령 당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도 평양대사를 선택하겠느냐고. 짓궂은 질문에 그는 당황하면서도 단호하게 답했다. “지금도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 DJ의 햇볕정책 계승을 위해 진보개혁 세력의 재집권이 필요합니다. 그게 제가 정치를 하는 이유입니다. 평양대사를 하겠습니다.”
/송종호·방진혁기자 joist1894@sedaily.com 사진=이호재기자
장관 후보자 9명 낙마시킨 '박지원 수첩' |
#장면2. 2009년 7월 천성관 당시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리기 직전 박 의원은 천 후보자 부부와 사업가 박모씨 부부가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물품을 구입한 내역을 공개했다. 천 후보자는 그런 일이 없다고 했으나 다음날 박 의원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나자 청와대는 경질을 결심했다. ‘검찰 쇄신’ 카드로 국정 장악력을 높이려던 이명박 대통령의 구상도 흐트러졌다.
‘박지원 수첩’의 힘은 가늠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9명의 장관 후보자를 낙마시킨 힘도 수첩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조심스럽게 수첩 일람을 요청했다. 정보와 일정·메모·단상 등이 깨알 같은 글씨로 촘촘히 박혀 있었다. 박 의원의 이 ‘수첩’ 속에서 김학의 전 차관과 천성관 후보자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온 셈이다. 그가 2012년 저축은행 금품수수 혐의로 수사를 받았을 때 무죄를 입증한 것도 수첩 내용이었다. “앳어글랜스(AT-A-GLANCE) 로고가 박힌 검정색 수첩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제가 미국에서 사다 드린 후 김 전 대통령도 똑같이 써왔어요. 제가 이 수첩을 들면 인사청문회에서 후보자들이 벌벌 떨잖아요”라며 통쾌하게 웃었다.
이런 자신감은 성실함에서 나왔다. 지금도 수첩을 늘 들고 다니며 중요한 일과 정보는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1년에 20권가량을 기록하는 성실함은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저는 김 전 대통령 대 박지원의 투쟁에서 생존했어요. 김 전 대통령은 대안을 내놓기를 원했지만 많은 참모가 어려워했죠. 하지만 저는 제 주장과 김 전 대통령의 주장이 다르면 토론을 해서 결론을 냈어요. 그 원천이 바로 이 수첩입니다.”
빨간색·파란색·검정색 세 가지 색깔로 메모가 된 이유를 묻자 “그건 나만 아는 비밀이에요”라며 수첩을 거둬갔다. 그는 “윤석열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에서 준비한 게 두 가지”라고도 했다. 박 의원의 수첩이 조만간 또 열릴지도 모를 일이다. /송종호·방진혁기자 joist1894@sedaily.com 사진=이호재기자
◇He is…
△1942년 전남 진도 △1964년 단국대 상학과 △1970년 럭키금성상사 입사 △1975년 데일리팻숀스 대표이사 △1980년 미국 뉴욕한인회 회장 △1992년 민주당 국회의원(전국구) △1998년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1999년 문화관광부 장관 △2002년 대통령비서실 실장 △2008년 국회의원 당선(목포) △2010년 민주당 원내대표 △2012년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2016년 국민의당 원내대표 △2017년 국민의당 대표 △2018년 민주평화당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