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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 삶이 각박해도 더 먼저 더 오래 사랑하라

■사랑,죽음,그리고 미학- 사랑의 꿈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바늘구멍 취업문 뚫기에 매달려

연애마저 포기한 청춘들 가득

'아르테미스 전성시대'인듯 하지만...

존재하려면 사랑이 있어야하고

사랑의 깨달음은 삶 뒤에 오듯이

사랑과 삶은 하나의 원으로 엮여

강석인 ‘꿈의 간극’.




대학교에서 젊은 청춘들을 앞에 두고 이따금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가 있다. 지루해하던 그들의 눈동자에서 순간적이지만 본능적인 호기심의 불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야기 내내 초롱초롱함을 유지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거개 학생들의 눈망울에서는 반짝했던 총기가 이내 사라진다.

한번은 사랑 이야기마저 무관심한 학생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저는 모태솔로거든요. 또 취직준비로 한동안은 연애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리스 신화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우리 시대는 솔로의 신, 아르테미스의 전성시대다. 화려한 외양과는 다르게 아프로디테나 에로스는 제대로 힘을 못 쓰는 것 같다. 문제는 자발적인 아르테미스 신봉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플라톤은 ‘향연’이라는 책에서 사랑의 신 에로스가 ‘가장 오래된 늙은 신’이라고 말한다. 젊은이들이 사랑의 특권을 가진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상식인데, 이것을 부정하는 말이다. 색다른 이 주장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무엇이든 존재하려면 먼저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생명체가 존재하려면 탄생해야 하는데, 탄생의 전제조건은 사랑이다. 신들마저 탄생한 존재라면, 에로스는 신들의 족보 첫머리를 장식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사랑의 본질이 받음이 아니라 ‘줌’에 있고, 줄 수 있는 이는 연장자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베풀 수 있는 자는 이미 많은 것을 소유한 자여야 하는데, 무언가를 소유하는 데는 긴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에로스는 연륜이 있는 신이 아닐 수 없다. 에로스가 나이 많은 신인 두 가지 근거는 각각 사랑이 ‘기원’과 ‘성숙’의 시간과 결부돼 있음을 가리킨다. 요컨대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더 먼저 더 오래’됐다는 것이다.

정현종 시인


정현종 시인은 젊은 시절 수수께끼 같은 시들을 많이 남겼다. 지금까지 이어오는 그의 왕성한 시 창작은 젊은 날 자신이 멋모르고 적어둔 수수께끼(영감·신탁)를 푸는 과정의 산물로도 볼 수 있다. ‘사물의 꿈 4- 사랑의 꿈’이라는 작품은 시인이 생의 위태로운 길목에서 스핑크스에게 시험당한 대표적인 수수께끼다.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항상 생(生) 뒤에 온다./그대는 살아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그렇다면?/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사랑은 항상 뒤늦게 찾아온다. 이것은 마음에만 담아뒀던 이를 잃은 후의 한탄일 수 있다. ‘모태솔로’ 운운하며 사랑을 모른다고 말한 학생의 처지를 대변하는 말일 수 있다. 굴곡진 인생을 살며 사랑의 의미를 깨달은 원숙한 사람의 말일 수도 있다. 아무튼 사랑이 타인과의 만남에서 시작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자타(自他)를 전제한다. 자기의 생이 있고 난 다음에야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사랑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각박한 생도 사랑을 꿈꾼다. 나는 결국 너를 지향하게 돼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이 경우도 (너를) 사랑하고 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너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너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나의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르시시즘이다. 나의 생을 중심으로 사랑을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는 아무리 이타적인 행위도 자기의 기쁨으로 해석되고, 타인의 슬픔에 대한 절절한 연민도 자기 연민으로 귀착된다. 아무리 미화해도, 우리네 사랑은 고작 내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에 불과하다. 사랑은 자기 생에 종속된 장식품일 뿐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시는 대반전을 기도한다. ‘그렇다면’이라는 낱말이 그 전환점이다.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완벽한 역전이자 뒤집기다. 여기에는 과연 어떤 논리가 깔려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시는 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수께끼로 보이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에로스가 나이 많은 신이라는 주장의 첫 번째 근거가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사랑이 자타를 전제한다고 했지만, 사실 자타도 사랑을 전제한다. 예컨대 부모의 사랑 없이 어찌 내가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그 밖에도 우리는 부모 이외의 양육자들, 즉 이웃·친구·선생·땅·나무·별 등의 사랑을 먹고 자랐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의 ‘자기’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사랑 없이는 ‘자기’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르시시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사랑이 그런 자를 키웠다는 것을 뜻한다.

호접지몽(胡蝶之夢), 꿈과 현실의 물고 물리는 관계를 가리키는 고사성어다. 사랑과 생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생의 꿈이다. 생은 사랑을 갈망한다. 생이 각박해질수록 그 갈망은 더 커진다. 반면에 생은 사랑의 꿈이다. 생은 사랑의 현실화이자 육화이기 때문이다. 호랑이 담배 물던 시절의 사랑이나 플라토닉 러브가 허깨비나 유령 같은 모습을 지양하려면, 나르시시스트의 몸이라도 빌려야만 한다.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이렇듯 앞뒤 선후가 뒤바뀔 수 있는 것은 그 둘이 원환의 구조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생은 원 속에서 하나다. 하지만 어리석은 우리는 이것을 삶에서 깨닫고 실천하지 못한다. 어리석기에 뒤늦은 후회를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생은 사랑 뒤에 오는 게 맞지만, 사랑의 깨달음은 우여곡절을 다 겪은 생 뒤에야 온다. 그나마 오기만 해도 다행이다. 연륜이라는 것이 마냥 지혜를 보장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고정희 시인의 성경적 어투로 글을 맺어 보자면, ‘사랑의 삼보 - 상처와 눈물과 외로움 가운데’(‘더 먼저 더 오래’)에서 더 먼저 사랑하고 더 오래 사랑하라. 그런 자에게 복이 있나니.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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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규 기자 여론독자부 sk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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