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의 운명을 좌우할 일본의 한국 화이트리스트(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 국가 목록) 제외를 막을 마지막 기회인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태도가 관망에서 중재로 변한 정황이 31일 포착돼 주목된다.
일본의 한국 화이트리스트 제외가 공식화될 경우 한일 갈등은 경제 분야를 넘어 안보영역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미국의 대중(對中) 봉쇄 전략의 핵심축인 한미일 동맹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지난 23일 중러의 군용기가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카디즈)을 침범한 배경도 한일 갈등에 따른 한미일 동맹의 약화에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 정책으로 대변되는 중국의 팽창을 저지해야 하는 트럼프 행정부는 한일관계의 파국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일관계의 분수령이 될 ARF 회의를 앞두고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30일(현지시간) 한미일 외교장관회담을 공식화한 것도 미국의 중재 역할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실제 트럼프 행정부가 한일관계의 악화를 막기 위해 양국에 분쟁중지협정을 제안하는 것을 넘어 ‘중재안’까지 제시했다는 아사히신문의 보도도 나왔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폼페이오 장관이 공개적으로 한미일 외교장관회담를 언급한 것은 3국 간에 사전 교감이 있었다는 증거”라며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데이비드 스틸웰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등의 연쇄 한일 방문 등을 고려하면 나름대로 미국이 물밑에서 한일 갈등을 관리했을 것이고 ARF 회의가 한일관계의 중대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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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단행 이후 처음으로 한일 외교장관회담이 성사된 데도 미국이 일정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청와대가 한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안을 협상 테이블에 올리겠다고 밝힌 만큼 기존의 1+1(한국기업+일본기업) 기금 마련 방법 외에 ‘+α(한국 정부)’를 일본 측에 제시할지도 관심이다.
다만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일본 내 공모 의견의 90% 이상이 찬성 입장을 밝혔고 우리 정부가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관련해 뚜렷한 태도 변화가 없는 만큼 미국의 개입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다.
실제 일본 정부는 미국이 한일 양측에 중재안에 제시했다는 언론 보도를 즉각 부인하며 대한(對韓) 강경 기조를 이어갔다. 일본 정부의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이와 관련, “그런 사실이 없다. 일관된 입장에 기초해 다양한 문제에 대해 계속 한국에 적절한 대응을 강하게 요구할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최은미 국립외교원 교수는 “일본 측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철회할 명분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며 “아베 내각은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관련한 한일 갈등 상황에 대해 단계적 접근을 하고 있다. 반도체 품목 세 가지 수출규제와 한국 화이트리스트 제외는 하나의 세트로 접근했던 것으로 보이는 만큼 추가 보복 조치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정부는 일본의 한국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막기 위한 막판 담판에 올인한 후 실제 이뤄질 경우에는 필요한 모든 조치를 통해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ARF 참석차 방콕에 도착한 후 기자들을 만나 한일 장관회담에 대해 “외교적 해결을 위해 외교 당국 간 협의를 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일본 측과 공감을 이뤄낼 생각을 가지고 회담에 임할 것”이라며 “그 공감대마저 없다면 정말 소통이 단절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일외교장관회담은 8월1일 오전 8시40분(현지시각) 열린다. 이는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 제한 조치가 취해진 후 한일 외교 수장의 첫 공식회동이다.
동시에 청와대는 이날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긴급 상임위원회 회의와 관련한 보도자료를 통해 “우리의 노력에도 일본이 이런 조치를 철회하지 않으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나갈 경우 우리 정부는 가능한 모든 조치를 포함해 단호히 대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방콕=정영현기자 박우인·양지윤기자 wi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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