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불행은 정녕 일본의 축복일까. 태평양전쟁 전범 국가로 찍힌 전후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킨 주역으로 기억되는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전쟁은 신이 내린 선물’이라며 반겼다. ‘운 좋게도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 경제 재건을 급속도로 진전시켰다’는 것이다. 전시뿐 아니다. 평시에는 한국과 무역으로 천문학적인 흑자를 누렸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대일 교역에서 입은 누적 적자가 700조원을 넘는다. 수교 이전부터도 일본에 뜯겼다. 수단은 밀무역. 밀수선들이 부산 일대 남해안과 대마도를 오가며 일제 화장품과 직물, 약품류, 카메라와 전자제품을 들여왔다.
대마도에는 밀수중개상도 32개사가 활개쳤다. 대마도의 중심 항구인 이즈하라는 일본에서도 가장 큰 호황을 구가했다. 정부는 밀수 근절을 외쳤으나 오히려 밀수는 늘어만 갔다. 밀수범들은 자금과 해상운반, 하역, 육상운반과 보관, 판매조직을 분리하고 폭력배는 물론 권력기관의 비호까지 받았다. 단속 정보가 줄줄 새 나가는 구조 아래 어쩌다 세관 감시선이 밀수선을 적발해도 소용없었다. 속도가 10노트인 감시선을 30노트로 따돌리면 그만이었으니까. 이보다 큰 밀수 보호벽은 일본의 묵인과 방조였다. 밀수선들은 일본 세관과 해군·검역소 등의 관인이 찍힌 서류를 들이대는 일본인 행세로 당국을 속였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65년 현충일 아침 현역 군인과 경찰이 낀 밀수단의 하역 현장이 잡히면서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군까지 동원했다. 1965년 8월2일 오후3시 대마도를 출항한 밀수 용의 선박이 영해로 들어오자 추격전이 펼쳐졌다. 어둠이 깔리며 밀수선은 여느 때처럼 30노트의 속도로 도망쳤다. 진로를 막아도 도망치는 밀수선에 해군 쾌속정은 기관포 300여발을 쐈고 오후7시30분, 5톤짜리 밀수선 영덕호는 화재와 함께 가라앉았다. 밀수선에 타고 있던 3명은 탈출해 목숨을 건졌지만 밀수 시장은 얼어붙었다.
이듬해인 1966년 일본은 밀수선을 나포해 예인하던 한국의 세관 감시선을 납치하는 사건까지 일으켰다. 강력한 항의로 6시간 만에 풀려났지만 정부는 이를 외교 문제로 끌어올렸다. 결국 일본 측의 시정 약속을 받아냈고 대마도에서 출발하는 대규모 밀수는 사라졌다. 눈앞의 이익이라면 불법까지 정당화하며 한국 시장을 교란하려던 일본의 행태는 지금도 여전하다. 한반도의 안정을 재앙으로 여기는 것도 모자라 먼저 쪽박을 깨자고 달려들다니. 우리는 불의에 굴하지 않는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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