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수출규제가 시작된 지 한 달 반이 지났다. 지난달 4일 일본 경제산업성이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핵심소재인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에칭가스 3개 품목의 한국 수출 시 기존의 포괄수출허가를 개별수출허가로 전환했고 7일에는 전략물자 수출관리제도 운영상 한국을 ‘화이트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한다고 공표했다. 이와 같은 일본의 갑작스럽고 일방적 조치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광범위한 불매운동과 ‘No 아베’ 시위 등을 전개하고 있다.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감정적인 대응을 해오던 한국 정부도 12일 일본을 ‘화이트국가’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아베 정권이 무엇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했을까. 이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의견이 제시됐지만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직접적으로는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대해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판결을 내린 것에 대한 보복조치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훨씬 복잡한 속내가 있다. 일본의 의도를 알아야 적절한 대응방안이 나올 수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일본의 의도는 크게 세 가지로 분석되고 있다. 첫째는 지지세력 결집을 위한 정치적 동기에서 ‘한국 때리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과거사를 재정립해 평화헌법 9조를 개헌하고 정상국가화를 도모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기술패권 다툼에서 한국을 확실히 제압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수출규제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역사적·경제적 동기가 복합적으로 내재돼 있는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 그동안 우리 정부의 대응하는 모습은 일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취해진 것 같지는 않다. 마치 새로운 독립운동을 독려하는 듯한 발언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성공했을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불확실성 증가로 인한 피해 확대가 불가피해 보인다.
원인에 따라 처방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문제에 대해서는 원인을 명확하게 규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처방이 중구난방으로 이뤄지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일본의 수출규제 철회 정도를 원하는지,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원하는지, 아베 정권이 망하기를 원하는지, 극일을 통한 새로운 관계정립을 원하는지 불분명하다.
양국 정상의 회동을 통해 외교적 해법이 도출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로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중재가 가장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정책당국자가 우리가 ‘글로벌 호구’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이 역시 기대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내부적으로는 차제에 핵심소재와 부품의 대일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중소기업 연구개발(R&D) 지원 체계를 개선하고 기업생태계를 상생형으로 바꿔나가자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이 역시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다.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과 우리의 피해는 거의 없고 일본만 역풍을 맞을 것이라는 주장도 선동과 다름이 없다. 국산화와 관련해 ‘이론’이 아닌 ‘현장의 목소리’를 강조한 양향자 일본경제침략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기업들의 탈한국이 가속화될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업에 대한 인식전환과 제도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민족의 저력’을 운운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외부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준비하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일본의 부당성을 알리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 정부가 내놓은 카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 for tat)’라는 맞대응정책이다. 이는 무조건적인 보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인 사고가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지 않는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전략은 이 게임이 반복될 경우 처음 만난 상대방에게는 협력하고, 두 번째 만남부터는 상대가 바로 전 만남에서 취했던 선택지를 그대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설령 한번 배신했던 상대라도 다시 협력의 손길을 내밀면 협력해준다는 것이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대응을 경제적인 문제로 국한할 경우 한국의 선택폭은 넓지 않기 때문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도쿄올림픽,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등 다양한 대응카드를 고려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카드를 쓰더라도 궁극적으로 양국의 협력관계를 이끌어내는 것이 목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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