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입니다. ‘영원한 인동초’로 불리는 김 전 대통령의 평생 반려자였던 이희호 여사와 큰 아들 김홍일 전 의원마저 올해 남편과 아버지 곁으로 갔으니, 김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겐 10주기의 의미가 더 클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이날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김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만 봐도 그랬습니다. 10년 전 김 전 대통령의 서거 후 국장(國葬)으로 할지, 국민장(國民葬)으로 할지를 두고 사분오열했던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정부와 정치권 여야 인사가 서로 손을 잡고 인사하고, 고인의 생애를 함께 기리는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 정치가 그래도 조금은 발전한 듯 보였습니다.
“아버지 잃었다”…소혼단장(消魂斷腸) 했던 그들
이날 현충원에 모인 정부와 국회, 각계 인사 대부분은 김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소혼단장’(消魂斷腸·슬픔으로 넋이 빠지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 괴로움)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미 고령에 병환이 깊었기에 김 전 대통령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당시 그들의 충격은 컸습니다.
“슬퍼서 말을 할 수가 없다. 우리에겐 아버지 같은 분이었고 살아계신 것만으로 힘이 됐었다”(문희상 국회 부의장)
“내 삶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마치 아버지와의 이별을 알지 못하는 아이처럼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제3자로서 말하기 어렵다”(이낙연 민주당 의원)
“큰 지도자를 보내서 마음이 여간 무겁고 슬픈 게 아니다”(이해찬 전 국무총리)
“서슬 퍼런 독재의 서슬에 굴하지 않았고, 경제파탄도 거뜬히 넘어오신 당신, 반세기 갈라진 채 원수로 살아온 민족이 한 동포임을 알게 해준 당신을 보낼 준비가 아직 돼 있지 않다”(노영민 민주당 대변인)
이날 추도식에 참석하진 않았지만 오전 일찍 추모글을 올린 문재인 대통령도 당시 “나라가 어렵고, 남북관계가 큰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처럼 경륜 있는 지도자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셔야 하는데, 정말 비통하고 안타깝다”고 슬퍼했습니다.
10년 후 이젠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여당 대표
그리고 10년이 지났습니다. 김 전 대통령 서거에 깊은 슬픔에 빠지고 말을 잃었던 정치인들은 이제 책임이 더 막중한 자리에 올랐습니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대통령, 문희상 국회 부의장은 국회의장, 이낙연 의원은 국무총리,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여당 대표가 됐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더 이상 ‘아버지, 스승 또는 형’을 그리워하는 ‘아들, 제자 또는 동생’이 아니라 이제는 다음 세대에게 ‘아버지, 스승, 형’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겁니다.
결은 다소 다르지만 이날 추도식에 참석했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011년 한 교회 강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김대중씨’라 부르고, 김 전 대통령·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인사를 ‘환란(患亂)’에 빗대 비하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잠시 논란을 빚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제1야당 대표로서 국민을 통합하는 일에 책임이 있습니다.
이들이 오늘 내놓은 추도사, 추모사에서도 현재 맡은 각자 자리의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문 대통령은 1982년 김 전 대통령이 옥중에서 가족에게 보낸 서신의 한 구절을 인용해 “전진해야 할 때 주저하지 않고, 인내할 때 초조해하지 말며, 후퇴할 때 낙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또 “국민과 함께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꼭 보여드리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총리는 “대통령님 평생의 좌우명인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고자 노력하겠다”며 “유언처럼 주신 말씀대로,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고 믿으며 대통령님의 길을 따라 걷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격동의 동북아…특히 주목 받는 DJ의 외교 혜안
이날 추도식에서 특히 주목받은 건 김 전 대통령의 ‘외교’에 대한 접근법이었습니다. 남북으로 나뉜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와의 양자 및 다자 외교가 요즘 너무 어려운 국면인 탓입니다. 무엇보다 역사 갈등이 경제 분야로 옮겨붙은 한일 관계를 김 전 대통령의 지혜에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습니다.
문 대통령과 문 의장은 1998년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김 전 대통령이 공동 발표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주목했습니다.
또 이 총리는 “우리나라도, 세계도 변화하고 있다. 우리도 과거의 우리가 아니고, 이웃 나라들도 과거의 그들이 아니다”며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의 조화와 비례의 지혜는 더욱 소중하다”고 말했습니다.
제1야당을 대표하는 황 대표도 “대통령님은 1998년 10월 일본을 방문해 21세기 한일 공동 파트너십을 구축했다”며 “한일 양국이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자는 선언, 즉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라고 떠올렸습니다.
물론 일각에선 한일관계를 두고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현재 많이 어려운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침략 역사 정당화와 개헌 시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제일주의’,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중국몽’,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신(新)남하 전략’ 그리고 쉽게 핵을 놓지 못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까지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실만 개탄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도쿄 한 복판에서 한일의 미래를 위한 담판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현재의 어른들’이 김 전 대통령의 지혜로부터 더 나은 해법을 찾아내길 다음 세대들은 지금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김 전 대통령의 생전 명언의 힘을 보여달라고 말입니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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