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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차이콥스키 '1812년 서곡'

1882년 '국민음악' 초연

차이콥스키의 명곡 ‘1812년 서곡’에 영감을 준 보로디노 전투. /위키피디아




1882년 8월20일 모스크바. 완공을 앞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앞 특설 대형 텐트.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당시 42세)가 작곡한 ‘1812년 서곡(1812 Overture)’의 장엄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묘사 음악, 전쟁 음악의 대표로 손꼽히는 1812년 서곡이 선보인 순간이다. 러시아는 이 곡에 온갖 공을 들였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퇴한 1812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야외공연에 모스크바시 모든 성당의 종과 포병대의 대포까지 동원했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1881년 3월 암살당하는 통에 규모가 줄고 실내공연으로 바뀌었지만 1812년 서곡의 초연은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프랑스 국가인 마르세예즈와 러시아 민요를 섞어 전투 장면을 긴박하게 묘사하고 마침내 승리를 따낸다는 내용의 15분짜리 공연은 차이콥스키의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정작 차이콥스키 자신은 6주 만에 완성한 1812년 서곡을 ‘시끄럽고 예술적 강점이 하나도 없다’고 자평했으나 러시아인들은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 그의 3대 발레 작품 이상으로 이 곡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축제를 위한 작곡만큼 맥 빠지는 일이 없다’며 시큰둥한 마음을 가졌던 차이콥스키는 왜 이 곡을 썼을까. 돈과 시대, 두 가지가 작용했다. 차이콥스키는 유행처럼 번지던 열렬한 슬라브주의를 꺼렸으나 19세기 후반은 스스로 의식하지 않아도 누구나 민족주의자가 되는 시대였다. 1876년에 ‘슬라브 행진곡’을 쓴 적도 있다. 씀씀이가 커 늘 돈이 모자랐던 점도 작곡 배경. 14년 동안 수천 통의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정신적 사랑을 나눴던 9년 연상의 미망인 폰 메크 부인의 연간 후원금 6,000루블도 부족할 만큼 경제관념이 없었다고 한다.

‘조국 전쟁(대프랑스 전쟁)’ 전승 70주년과 열다섯 번째를 맞는 러시아 예술산업 박람회의 개막식 공연으로 초연된 1812년 서곡은 바로 세계로 퍼졌다.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세계 각국에서 ‘위풍당당 행진곡’과 함께 승리 찬가로 자주 쓰인다. 미국에서는 독립기념일에 즐겨 연주될 정도다. 러시아는 말할 나위도 없다. 국민 음악의 힘은 자긍심을 일깨워 역사를 바꾼다. 주세페 베르디의 나부코(1842년)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인들의 국민 찬가, 비공식 국가로 자리 잡으며 통일 의지를 북돋았다. 무엇인가를 목놓아 부르고 싶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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