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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862년 나마무기 사건

日 근대화에 깔린 자긍심

영국인 찰스 리처드슨이 일본인 무사들에 의해 살해당한 장소 부근에 세워진 비문.




1862년 8월21일 일본 지방정부의 무사들이 영국 관광객에게 칼을 휘둘러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마무기(生麥·현재 요코하마시 쓰루미구) 마을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일본 근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웅번(雄藩·유력 영주)의 하나인 사쓰마번이 영국과 짧은 전쟁(사쓰에이전쟁·1863년)을 치르고 존왕양이(尊王攘夷)를 고집하던 개혁파 무사집단이 선진문물 배우기에 나섰다. ‘싸움에서 지는 것은 분하지만, 승자에게 배우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고방식이 자리 잡았다.

발단은 유력자를 호위하는 400여명 무사들과 영국 관광객 4명의 조우. 유력자란 사쓰마번의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의 친부인 히사미쓰(久光·당시 45세)로 일본 정가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인물이었다. 조정(일왕)과 막부(쇼군)가 타협해 위기를 넘겨야 한다는 ‘공무합체(公武合體)’를 지지하던 그는 1862년 700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상경, 일왕과 쇼군을 오가며 막정(幕政·정치체계) 개편을 이끌어냈다. 17세기 초부터 류쿠(오키나와)를 점령하는 위세를 떨쳤던 사쓰마번이 19세기 경제혁신으로 경제력을 지녔다고 해도 이만한 영향력을 발휘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히사미쓰가 교토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마주친 영국인 4명은 아무런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 마침 사건 직전 사쓰마 행렬을 만난 미국 상인 유진 리드는 말에서 내리고 모자를 벗어 예를 표시했다. 영국인들이 무사들의 눈짓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정면에서 행렬을 방해하듯 다가오면서 사달이 났다. 분노한 무사들이 칼을 뽑자 영국인들은 달아났으나 1명이 죽고 2명이 다쳤다. 영국인 여성도 칼을 맞았으나 모자와 머리카락만 베이고 부상을 입지 않았다.

살해당한 영국인 찰스 리처드슨(28세)에 대한 평가는 영국 측 기록조차 나쁜 편이다. 상하이에서 사업하면서 ‘동양인들을 대하는 법을 잘 안다’며 툭하면 채찍을 휘둘렀다. 영국은 그래도 사쓰마번과 전쟁까지 치르며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배상을 받아냈다. 전쟁을 통해 서로의 실력에 놀란 양쪽은 대화를 택했고 일본 근대화는 더욱 탄력받았다. 눈길이 가는 대목이 따로 있다. 일본 민중은 이 사건에 환호했으나 막부는 ‘또 사고 쳤느냐’며 골머리를 싸맸다. 각지에서 외국인 살해가 꼬리를 물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일본 근대화의 바탕에는 ‘외국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는 기개가 깔려 있다. 궁금하다. 조선에서는 희귀한데 일본에는 흔했던 결기와 자부심이 오늘날 대한한국에 과연 존재하는지.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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