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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1945년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강제징용도 모자라 수장까지

내달 개봉예정인 다큐멘터리 영화 ‘우키시마호’의 포스터.




1945년 8월22일 10시 일본 오미나토항. 귀향의 기대에 들뜬 조선인을 가득 태운 우키시마호(浮島丸)가 항구를 떠났다. 목적지는 부산. 강제징용 조선인의 귀국선 1호로 25일 부산항에 입항 예정이었으나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8월24일 오후 항로를 변경해 마이즈루항에 입항하려다 침몰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 사고로 549명(조선인 524명, 일본 선원 25명)이 목숨을 잃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은 다르다. 조선인 3,000~1만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밝힌 공식 승선인원(3,725명)조차 의문 대상이다.

우키시마호 침몰의 핵심 의혹은 원인. 일본 정부는 태평양전쟁 중 미군이 살포한 기뢰에 접촉해 폭발한 후 침몰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출항 전부터 오미나토항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강제 귀국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조선인 사회에는 ‘우키시마호가 아니면 다시는 귀국선을 탈 수 없다’는 낭설이 퍼졌다. 강제징용 조선인을 배정받았던 일본 회사들은 ‘배를 안 타면 배급을 끊겠다’고 윽박질렀다.



반강제로 승선한 조선인처럼 일본인 선원들도 두려움에 떨었다. ‘부산에 입항하면 조선인들에게 다 총살당할 것’ ‘이 배는 자침할 예정’이라는 말이 돌았다. 두려움대로 우키시마호는 가라앉았다. 폭발 직전 255명의 승무원 가운데 상급자들은 작은 보트를 타고 떠났다는 의혹을 받았다. 9년 후에 인양된 선체에서는 안쪽에서 바깥으로 찢겨 나간 흔적이 나왔다. 기뢰 피격이 아니라는 증거였으나 바로 사라졌다. 일본 정부가 인양한 배를 재빨리 고철로 팔아버린 탓이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일제는 조선인들을 강제로 부려 먹다 쓰레기 버리듯 바다에 투기한 셈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정권에서도 제대로 조사한 적이 없다. 재조명은 오히려 일본에서 시작했다. 1965년 재일사학자가 책을 내고 NHK가 1977년 다큐멘터리 ‘폭침’을 방영해 이목을 끌었다. 1996년 일본에서, 2002년에는 북한에서 관련 영화가 제작됐지만 이 땅에서의 관심은 최근의 일이다. 피해자 유족들은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냈으나 2001년 도쿄 지법에서 일부 승소한 뒤 2003년 고법과 2004년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연이어 졌다. 근거는 1965년 한일협정에 따른 청구권 일괄 소멸. 광복 이후까지 소급하는 저들의 발상이 놀랍다. 화해를 위해서도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 알고 용서하는 것과 모르고 속는 것은 천지 차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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