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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포르쉐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 최고의 공학기술자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히틀러 나치 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20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히틀러의 압박으로 국민차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한 것이 문제였다. 이 프로젝트에 따라 그가 개발한 첫차가 바로 비틀(Beetle). 원래 차명이 ‘kdf-wagen’이었는데 미국에 수출되면서 현지에서 딱정벌레를 닮은 외관을 보고 ‘비틀’이라고 부른 것이 그대로 고유명사가 됐다.

비틀이라는 역작의 탄생에도 불구하고 포르쉐에게 나치 시절은 암흑기였다. 1931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자동차 설계업체 ‘Dr.포르쉐’를 설립했으나 히틀러에게 시달리느라 10년 넘게 정작 자기 이름을 내건 차를 제작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어의 몸에서 풀리자마자 그가 아들 페리와 함께 절치부심 끝에 1948년 선보인 것이 포르쉐356. 자신이 설계한 비틀의 차체와 부품을 활용해 만든 이 스포츠카는 처음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1950년대 초 세계 자동차 마니아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포르쉐가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포르쉐356의 독특한 외형을 보고 사람들은 ‘점프하는 개구리’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이후 포르쉐 차량에 개구리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하지만 포르쉐가 세계 4대 스포츠카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모델은 포르쉐911이다. 196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등장한 911은 넓은 실내공간에 강력한 성능, 독특한 디자인으로 단숨에 마니아들을 사로잡으면서 포르쉐의 상징이 됐다. 포르쉐911을 필두로 한 포르쉐시리즈는 지난 50여년간 스포츠카 경주대회에서 2만3,000여 차례의 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포르쉐가 마냥 잘 나갔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초 방만한 경영으로 부도 직전까지 갔던 적이 있다.

당시 대주주였던 폴크스바겐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했으나 한동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시 숨통을 터준 건 박스터(포르쉐986)와 최초의 스포츠유틸리티(SUV)모델인 포르쉐카이엔. 두 모델은 공전의 히트를 쳐 2000년대 들어서는 911보다 더 잘 팔린다고 한다. 환경부가 20일 국내에서 판매된 포르쉐 경유차가 배출가스를 조작한 정황을 확인해 과징금 40억원 부과와 함께 형사고발을 예고했다. 아무리 판매실적이 중요하다지만 세계적인 명차까지 소비자를 속이려고 했다니 안타깝다. /임석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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