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여러 가지 소리가 있다. 고함치는 소리처럼 듣기 거북한 경우도 있지만 연주처럼 듣기 좋은 경우도 있다. 듣기 좋은 소리라면 부모가 아이에게 책 읽어주는 소리, 아이가 커서 홀로 손에 책을 쥐고 읽는 소리도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어릴 적에 늘 듣고 혼자 읽었던 소리는 사람의 영혼에 깃들어 쉬이 잊히지 않는다.
1970~1980년대만 해도 국어와 외국어 수업시간이면 선생님이 학생을 지목해서 당일 배울 본문을 소리 내어 읽게 했다. 이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학생도 있지만 언제 자신이 호명될지 몰라 숨을 죽이며 소리를 따라가는 학생도 많았다. 읽기의 마력은 한순간에 한 자밖에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읽기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아날로그식 학습의 전형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학교와 가장에서 책 읽는 소리가 줄어들고 있다. 요즘 책 자체를 즐겨 보지 않지만 책을 대하더라도 눈으로 훑어 내려간다. 책은 읽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대상이다. 심한 경우 보는 대상도 아니고 쓱 훑어내리는 대상이다. 이러다 보니 책은 깊게 만나지 못하고 짧은 시간에 필요한 정보를 쏙 뽑아내는 대상이 된다.
독서의 방식이 바뀌자 읽어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헷갈리고, 영화를 봐도 시간이 좀 지나면 봤는지 안 봤는지 분명하지 않다. 한 것과 안 한 것의 경계가 희미해지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건망증을 호소한다. 건망증 하면 이전에는 나이 든 분들의 기억력 감퇴로 설명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겪고 있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대인이 대상을 깊게 만나지 못하고 겅중겅중 또는 띄엄띄엄 만나다 보니 생겨나는 문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눈으로 쭉 훑는 방식이 아니라 입으로 읽고 손으로 쓰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통감(通感)의 책 읽기를 해보면 좋겠다. 독서를 어렵다고 하겠지만 백 번 되풀이해서 읽으면 그 의미가 저절로 드러난다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에서 출발해볼 수 있다. ‘견(見)’은 원래 ‘보다’는 뜻이지만 ‘드러난다’고 할 때는 ‘현’으로 읽는다. 이 때문에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기 위해 ‘보는 견(見)’과 ‘드러나는 현(現)’으로 나뉘게 된다. 현은 옥(玉)에 무늬가 있어서 눈에 훤히 보이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독서백편의자현’ 하면 주희가 한 말로 생각하기 쉽다. 주희는 ‘훈학재규(訓學齋規)’에서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많이 읽다 보면 자연히 이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주희는 사실 이 주장을 펼치면서 ‘독서백편의자현’이 후한 시대 동우(董遇)의 말로 소개했다. 동우는 가난하게 살면서 공부에 열중해 문명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배움을 청했다.
동우는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한 수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마땅히 먼저 책을 백 번 읽어야 한다. 그렇게 책을 백 번 읽다 보면 텍스트의 의미가 저절로 드러난다네(필당선독백편必當先讀百遍, 언독서백편기의자현言讀書百遍其義自見.).” 주희는 동우의 이 말을 7글자로 줄여서 입에 감기게 표현을 바꿨던 것이다.
‘독서백편의자현’의 방법은 느긋해서 좋아 보이지만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짧은 시간에 여러 책을 보지 한 권을 언제 백 번이나 읽겠느냐고 반론을 펼칠 수 있다. 여러 대상을 스치고 지나가듯 많은 경험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러니 고사성어는 듣기는 좋지만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 응시하며 하나라도 철저하게 꿰뚫게 되면 지금까지 경험과 학식이 하나로 연결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의미를 영혼에 새기는 ‘독서백편의자현’의 책 읽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읽고도 생각나지 않고 보고도 헷갈리는 건망증 증상을 겪지 않을 수 있다.
분초를 다투는 현대인이 삶의 모든 분야를 ‘독서백편의자현’ 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의 영역에서라도 ‘독서백편의자현’의 방식을 지키면 파편으로 나뉜 조각난 시간과 기억을 하나로 연결하는 길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먼저 자투리 시간에서부터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되풀이해 읽다가 ‘아!’ 하고 의미가 찾아오는 경험부터 시도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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