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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통해 세상읽기]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쓱 '훑어보기' 되어버린 독서

책 한권 백번 읽기는 어렵지만

한 분야라도 철저하게 꿰뚫으면

경험·학식 이어지며 의미 이해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세상에는 여러 가지 소리가 있다. 고함치는 소리처럼 듣기 거북한 경우도 있지만 연주처럼 듣기 좋은 경우도 있다. 듣기 좋은 소리라면 부모가 아이에게 책 읽어주는 소리, 아이가 커서 홀로 손에 책을 쥐고 읽는 소리도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어릴 적에 늘 듣고 혼자 읽었던 소리는 사람의 영혼에 깃들어 쉬이 잊히지 않는다.

1970~1980년대만 해도 국어와 외국어 수업시간이면 선생님이 학생을 지목해서 당일 배울 본문을 소리 내어 읽게 했다. 이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학생도 있지만 언제 자신이 호명될지 몰라 숨을 죽이며 소리를 따라가는 학생도 많았다. 읽기의 마력은 한순간에 한 자밖에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읽기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아날로그식 학습의 전형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학교와 가장에서 책 읽는 소리가 줄어들고 있다. 요즘 책 자체를 즐겨 보지 않지만 책을 대하더라도 눈으로 훑어 내려간다. 책은 읽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대상이다. 심한 경우 보는 대상도 아니고 쓱 훑어내리는 대상이다. 이러다 보니 책은 깊게 만나지 못하고 짧은 시간에 필요한 정보를 쏙 뽑아내는 대상이 된다.



독서의 방식이 바뀌자 읽어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헷갈리고, 영화를 봐도 시간이 좀 지나면 봤는지 안 봤는지 분명하지 않다. 한 것과 안 한 것의 경계가 희미해지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건망증을 호소한다. 건망증 하면 이전에는 나이 든 분들의 기억력 감퇴로 설명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겪고 있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대인이 대상을 깊게 만나지 못하고 겅중겅중 또는 띄엄띄엄 만나다 보니 생겨나는 문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눈으로 쭉 훑는 방식이 아니라 입으로 읽고 손으로 쓰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통감(通感)의 책 읽기를 해보면 좋겠다. 독서를 어렵다고 하겠지만 백 번 되풀이해서 읽으면 그 의미가 저절로 드러난다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에서 출발해볼 수 있다. ‘견(見)’은 원래 ‘보다’는 뜻이지만 ‘드러난다’고 할 때는 ‘현’으로 읽는다. 이 때문에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기 위해 ‘보는 견(見)’과 ‘드러나는 현(現)’으로 나뉘게 된다. 현은 옥(玉)에 무늬가 있어서 눈에 훤히 보이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독서백편의자현’ 하면 주희가 한 말로 생각하기 쉽다. 주희는 ‘훈학재규(訓學齋規)’에서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많이 읽다 보면 자연히 이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주희는 사실 이 주장을 펼치면서 ‘독서백편의자현’이 후한 시대 동우(董遇)의 말로 소개했다. 동우는 가난하게 살면서 공부에 열중해 문명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배움을 청했다.

동우는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한 수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마땅히 먼저 책을 백 번 읽어야 한다. 그렇게 책을 백 번 읽다 보면 텍스트의 의미가 저절로 드러난다네(필당선독백편必當先讀百遍, 언독서백편기의자현言讀書百遍其義自見.).” 주희는 동우의 이 말을 7글자로 줄여서 입에 감기게 표현을 바꿨던 것이다.

‘독서백편의자현’의 방법은 느긋해서 좋아 보이지만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짧은 시간에 여러 책을 보지 한 권을 언제 백 번이나 읽겠느냐고 반론을 펼칠 수 있다. 여러 대상을 스치고 지나가듯 많은 경험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러니 고사성어는 듣기는 좋지만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 응시하며 하나라도 철저하게 꿰뚫게 되면 지금까지 경험과 학식이 하나로 연결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의미를 영혼에 새기는 ‘독서백편의자현’의 책 읽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읽고도 생각나지 않고 보고도 헷갈리는 건망증 증상을 겪지 않을 수 있다.

분초를 다투는 현대인이 삶의 모든 분야를 ‘독서백편의자현’ 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의 영역에서라도 ‘독서백편의자현’의 방식을 지키면 파편으로 나뉜 조각난 시간과 기억을 하나로 연결하는 길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먼저 자투리 시간에서부터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되풀이해 읽다가 ‘아!’ 하고 의미가 찾아오는 경험부터 시도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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