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바람 속에 불티가 비처럼 쏟아지며 시내 전체가 불탔다.’ 평민 출신의 영국 해군경이자 방대한 일기로 유명한 새뮤얼 피프스가 일기장에 남긴 기록이다. 동시대의 작자 존 에벌린은 일기에 ‘맹렬한 화염이 천둥과 같은 굉음을 내고 부녀자와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다. 탑과 주택·교회가 불타고 무너지며 공기마저 뜨겁고 붉게 물들었다. 화염은 폭과 길이가 2마일(약 3.2㎞)에 이르렀다’고 썼다. 발화점은 빌링스게이트 어류시장 부근 푸딩레인의 빵 가게.
왕실 제빵인이며 해군 납품업자인 점주 토머스 페리너는 1666년 9월2일 오전2시께 매캐한 연기에 잠을 깼다. 불길에 놀란 그는 밖으로 뛰어 나갔으나 이미 옆 가게로 번졌다. 마침 강한 동풍이 1년 이상 가뭄에 바짝 말랐던 런던 구시가지 전역을 닷새 동안 태웠다. 긴급 투입된 군대가 건물을 대거 부수고 화약을 터트려 방화로를 만들 즈음 바람도 약해지며 가까스로 불길이 잡혔다. 결과는 참혹했다. 목조주택은 물론 석조건물마저 녹여버리는 화마로 87개의 교회와 1만3,200채의 주택이 사라졌다. 전체 건물의 80%가 전소되며 시민 8명 중 7명이 터전을 잃었다. 공식적인 인명피해는 6명. 부랑자와 무주택자, 일반 서민은 희생자 통계에서 제외됐다는 등 아직도 논란이 분분하다.
국왕 찰스 2세는 적극적으로 진화에 나섰다. 시민들 사이에 끼어 직접 물동이를 나르고 발 빠르게 이재민 긴급지원 대책도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대화재는 왕권을 안정시켰다. 왕정복고(1660년)와 흑사병, 2차 영란전쟁으로 어수선하던 영국 사회는 복구에 매달리며 사회적 통합을 이뤘다. 마침 프랑스가 네덜란드에 합세한 상황에서 영국인들은 방화범으로 25세 프랑스 청년을 지목해 10월 말 처형해버렸다. 열렬한 신교도(위그노)였음에도 ‘교황이 영국 교회를 압살하려고 보낸 첩자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과 고문으로 죽은 프랑스 청년은 화재 발생 이틀 후에 런던에 도착한 여행자였다.
대화재 이후 신기하게도 흑사병이 자취를 감췄다. 근대적 화재보험도 선보였다. 화재 진압 후 초기 대응이 가능했다는 반성론이 일었다. 국왕은 화재 발생 직후 ‘집을 허물어 넓은 방화지대를 만들라’고 지시했으나 런던시장의 우유부단함과 집을 잃지 않으려는 주택 주인들의 고집 탓에 시기를 놓쳤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은 복구에서도 반복됐다. 세포를 규명한 로버트 훅을 비롯한 이들이 전면적인 도시 재건을 추진했지만 지주들에 의해 막혔다. 좁고 꾸불꾸불한 런던은 로마의 유산이 아니라 기득권 지키기의 소산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