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청소였다. 100년 가까이 꽁꽁 닫아뒀던 집은 며칠을 쓸고 닦아도 해묵은 때가 걷힐 줄 몰랐다. 서울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은 비운의 역사를 머금고 퇴락해 있었다. 근대 독립국가의 꿈을 품고 대한제국의 제1대 황제로 즉위했던 조선 26대 왕 고종(高宗)은 1919년 이곳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2012년 문화재청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덕수궁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설치미술가 서도호 씨는 빗자루를 들고 한탄했다. ‘고종은 얼마나 쓸쓸하고 참담했을까.’
서 작가는 삼축당(三祝堂) 김씨가 구술한 회고록에서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얘기를 읽었다. 삼축당은 고종의 마지막 후궁이었다. 그중 한 대목이 미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명성황후와 엄비를 차례로 잃은 고종은 침전에 늘 보료를 세 채 깔고 잠을 청했다.’ 보료는 전통 침구의 하나다. 한옥의 안방이나 사랑방에 방치레로 깔아뒀던 두툼한 요를 말한다. 솜이나 짐승의 털로 두껍게 속을 넣고 헝겊으로 싸서 선을 두르고 장식했다.
‘왜 자신이 누울 한 채가 아니고 세 채였을까.’ 서도호 작가의 ‘함녕전 프로젝트’는 이 질문에서 출발했다. 5월 특별상영회에서 공개된 다큐멘터리 ‘함녕전: 황제의 침실’은 이 프로젝트의 기획·제작·전시 과정을 7년에 걸쳐 정리한 기록물이다. 고종 역을 맡아 퍼포먼스를 펼친 안무가 정영두 씨는 보료 세 채를 깐 고인의 마음을 좇기 위해 모기떼에 시달리며 함녕전에서 하룻밤을 지냈고 고종이 잠든 홍릉을 찾아 묵상했다. 세 채의 보료는 혹시 비명에 먼저 간 왕비들을 향한 애도였을까. 고독한 군주가 스스로를 위로한 방편이었을까. ‘보료 세 채의 비밀’을 탐험하며 고종의 심상에 다가간 예술가들은 정사(正史) 밖 함녕전과 고종을 재발견하는 기쁨을 누렸다. 잠들어 있던 궁의 문을 열고 오늘의 훈김을 불어넣은 일은 이렇듯 소중하다.
서도호 작가는 고종과의 대화에 힘입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재현하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신라를 정벌하려는 당나라에 맞서 경주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세운 문무왕 이야기다. 절을 세울 시간이 부족하자 채색비단으로 임시건물을 만들어 당군(唐軍)을 물리친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지는데 지금은 기단만 남아 있다. ‘사천왕사’의 위용을 현대미술이 어떻게 되살려낼지 벌써 궁금해진다.
문화유산은 한번 사라지면 원형 그대로 복원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문화재 관리 업무의 첫째인 까닭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지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수천년 역사를 오롯이 품은 문화재들을 오늘 여기로 불러내 그 침묵을 딛고 더불어 대화하는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마침 덕수궁에서는 ‘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 기억된 미래’가 5일 개막했다. 아시아 건축가들이 다양한 설치미술로 대한제국이 꿈꾼 미래도시를 보여준다. 추석을 맞아 12~15일 4대 궁과 종묘, 조선 왕릉이 무료 개방되니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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