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4일 유럽연합(EU)은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노동 분야의 규정을 근거로 우리나라의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 문제를 검토하기 위한 전문가패널 설치를 요청했다. 이는 국내 3대 노동 관계법인 노동조합법·공무원노조법·교원노조법 개정과 관련한 민감한 이슈지만 한일 갈등에 이어 조국 법무장관 임명에 대한 논란이 온 나라를 뒤덮으며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FTA 협정에 따르면 전문가패널 구성 요청 후 2개월 이내 3명의 패널을 선임해야 하고 90일 이내 패널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문제를 제기한 EU 측은 내부 사정으로 아직 패널 명단을 정하지 못했지만 우리나라는 패널 명단을 확정해 통보했고 고용노동부는 7월31일 ILO 기본협약과 관련된 3개 노동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향후 작성될 전문가패널의 보고서를 검토하고 범국가 차원에서 논의해도 될 사항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노동부의 조치는 신속했다.
EU와의 FTA에서 ILO 8개 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노력하고 노동문제를 지속 가능성 차원에서 논의하기 위해 ‘무역과 지속가능발전위원회(TSC)’ ‘시민사회 대화 메커니즘’ 협의 및 분쟁해결을 위한 전문가패널을 구성하기로 했다. 전문가패널의 의견은 구속력 없는 권고적 성격이며 이는 강요보다는 설득을 우선시하는 EU의 외교정책과 같은 맥락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노동부와 노동단체는 EU의 전문가패널 구성 요청을 계기로 ILO 기본협약을 비준하지 않으면 EU가 무역보복을 해올 수 있다고 추진 논리를 전환했다. 미국이 중국에 강력한 무역보복을 하고 있고 일본은 강제노동의 대법원 판결에 대한 불만으로 백색국가(수출통관 우대 조치)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했고 이로 인해 무역보복에 대한 국민적 우려가 확산하면서 노동부로서는 무역보복 논리가 설득력이 있다고 봤을 것이다.
노동부는 “수출 비중이 큰 우리나라로서는 EU와의 분쟁이 현재 경제의 불확실성을 더욱 가중시키지 않을까 우려가 큰 상황”이라고 밝히면서 “EU와의 FTA와 관련한 잠재적 분쟁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도 ILO 핵심협약 비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의 한·EU FTA로 보면 ILO 기본협약 비준은 무역분쟁이 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FTA 협정에서 전문가패널 외 더 이상 제재 조치를 규정하지 않았고 ILO 기본협약 비준도 노력 의무를 부과했을 뿐 8개 협약을 언제까지 비준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지 않았다. 분쟁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협정의 국회 비준 과정에서도 점검됐고 EU 측도 분쟁으로 다룰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여러 문건에서 확인되고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 가속화, 고령화와 갈라파고스 규제 유지 등으로 우리 경제의 활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다양한 형태의 무역분쟁과 수출 리스크는 우리나라의 관심사항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ILO 기본협약 비준 논리로 무역분쟁 우려를 내건 것은 한·EU FTA를 아전인수 격으로 곡해한 것이다.
유럽은 민주주의와 보편적 인권확산·사회적참여 등 시민의식이 세계에서 제일 먼저 시작됐고 EU체제로 통합된 후에는 개별 회원국의 통상 분야 정책권한을 EU로 위임함에 따라 EU 차원에서 통상정책에 대한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청취하는 방안을 발전시켜왔다. 이것이 한·EU FTA에 전문가패널이 들어간 배경이다. 하지만 민간의 의견은 어디까지나 참고용이고 협정에 기초해 통상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EU의 통상정책이다.
선진국일수록 노동의 기본권리 보호 수준이 높지만 국가별로 특수한 사정이 있기에 ILO 기본협약을 모두 비준하지 않고 있다. 미국과 일본도 8대 기본협약 중 일부만 비준하고 있지 않은가. ILO 기본협약 비준 문제는 관련된 사항을 종합검토해 결정해야겠지만 EU와의 무역분쟁 우려는 고려 대상에서 제외해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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