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론자가 되는 것이 더 영리한 일이기는 하다. 비관론자는 실망을 곧 잊고,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리한 사람들이 낙관론을 꺼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낙관론은 본질적으로 현재 상황에 대한 견해가 아니라 생명력, 남들이 포기하는 곳에서 희망을 붙잡는 힘, 모든 것이 실패한 것처럼 보일 때 머리를 곧추세우는 힘, 급격한 악화를 견디는 힘, 미래를 적에게 맡기기는커녕 오히려 제 것이라고 주장하는 힘이다. 여러 번 거듭 틀려도, 우리는 미래에 대한 의지로서의 낙관론을 절대로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낙관론은 병든 사람이 감염시킬 수 없는 건강한 삶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옥중서신―저항과 복종’, 복 있는 사람 펴냄)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독일 나치 치하에서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39세에 교수형에 처해진 기독교인이다.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하기 직전까지도 ‘낙관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죄다 비관론에 빠져들 때도 그는 희망과 저항을 포기하지 않은 최후의 낙관론자였다.
현실 세계에서 낙관론자는 망신당하고 조롱당하기 십상이다. 사실 대부분의 인간사는 애초의 기대만큼 성공하는 경우보다 좌절되는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영리한 사람이 비관론을 택한다는 본회퍼 목사의 말은 승률 높은 쪽에 판돈을 거는 도박사의 습성과도 같은 것일 테다. 비관론은 ‘어차피 해봤자’라고 읊조리며 웅크리는 것이다. 자기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발을 빼는 것이다. 반면 낙관론은 막막한 상황에서도 적과 세월에 내 운명을 던져주기보다 미래가 아직 내 손에 있다고 믿으며 한 발을 뻗는 것이다. 본회퍼 목사는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이로써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 그가 옳았다. 그는 조금 일찍 생을 마쳤지만, 거악 나치와 히틀러에 끝내 복종하지 않고 저항한 최후의 낙관론자로 역사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이연실 문학동네 편집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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