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서 자동차부품 업체를 운영하는 이모 사장은 요즘 매출과 가동률이 지난해의 반토막으로 떨어져 급전을 마련하느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해외 수출길이 막혀 부족한 자금을 대출로 충당해야 하지만, 은행에서는 자동차부품 업종이 중점관리대상이라며 상환을 요구하는 바람에 직원들 월급 주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더 심각한 것은 수출 지원자금마저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산업현장에서는 기업을 문전박대하는 정책금융기관이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다며 하소연하고 있다. 국책은행마저 적폐몰이에 휩싸여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위험을 회피하는 데 급급하면서 잔뜩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엔진인 수출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올 들어 수출은 매달 감소세를 지속하면서 10개월 연속 마이너스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반도체나 자동차 등 핵심 업종일수록 타격이 심한데다 중국과 미국 등 주력시장의 감소폭이 크다.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정부는 대외변수 탓으로 돌리며 낙관론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여기에 일본과의 무역전쟁까지 겹쳐 수출 부진을 거론하는 것조차 꺼리는 분위기다. 수출 감소는 시차를 두고 민생에 치명타를 안기게 마련이다. 당장 연말부터 고용사정이 더 나빠지고 서민 가계의 주름살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은 누가 뭐래도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흔히 내수시장을 키워야 한다지만 우리 경제규모로는 어림도 없는 얘기다. 그럼에도 사회 전반을 보면 애써 수출해봐야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정부는 올 들어 3개월마다 한 번씩 수출활력대책회의를 열어 수출구조 개편이나 제조업 회생 같은 각종 대책을 쏟아냈지만 재탕 삼탕인데다 알맹이 없는 내용에 머무르고 있다. 그나마 일본 수출규제에 맞서야 한다며 기약 없는 부품소재 국산화에만 열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이런 위기상황에도 역대 정부마다 등장했던 무역투자진흥회의조차 한번 열리지 않았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원전 수출만 해도 그렇다. 정부는 얼마 전 원전수출전략회의를 열어 원전 정비와 수명연장 해체 등으로 해외 시장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무리한 탈원전 정책으로 원전 생태계를 뿌리째 흔들어놓고 이제 와서 원전 수출을 확대하겠다는 발상이 놀라울 따름이다. 다음달이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가 발생해 대체시장 개척에 나서야 하지만 누구 하나 대책을 마련한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이런 위기상황일수록 정부와 기업을 이어주고 신시장을 개척하는 금융의 역할이 중요한 법이다. 하지만 정책금융기관들은 뜬금없는 합병설이나 정치권의 지방 이전 요구로 술렁이고 있으니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하다. 심지어 어느 국책은행장에는 정치권의 영향력을 등에 업은 인사가 임명될 것이라는 얘기도 들려온다. 최고의 전문가가 나서도 부족할 판국에 코드 인사가 거론된다니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수출은 철저히 국가 대항전의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우리처럼 수출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생산비용을 낮추고 제품 경쟁력을 높여 기업들이 유리한 환경에서 글로벌 기업과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이런 터에 폐쇄적 민족주의를 고집하고 우리끼리 뭉치자며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이제는 기업인들이 왜 외교·안보 문제까지 걱정해야 하느냐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권 차원의 수출에 대한 강력한 의지일 것이다. 미증유의 위기를 맞아 대통령이 주재하는 무역투자진흥회의부터 부활하고 매일같이 수출 현황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모두가 ‘수출입국’이나 ‘수출 역군’을 과거의 일로만 치부하는 사이에 우리 경제는 밑바닥부터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때다. 정치 현실주의의 원조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앞으로 일어났으면 좋을 일에만 매달려 실제로 일어나는 문제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파멸로 이어진다”고 경고했다. 어쩌면 지금 대한민국에 딱 들어맞는 말일지 모른다. /정상범 논설위원 ssa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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