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장한 남성에게 위협당하는 딸을 구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을 가격해 다치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아버지가 국민참여재판에서 정당방위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현행법상 정당방위는 인정 요건이 매우 까다로우나 재판부가 배심원단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례적으로 무죄를 선고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남부지법 형사합의12부(오상용 부장판사)는 “특수상해, 특수폭행치상 등 혐의로 기소된 김모(48)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30일 밝혔다.
김씨는 지난해 9월 같은 건물 세입자인 이모(38)씨와 이씨의 모친 송모(64)씨를 1.5m 길이 죽도로 때려 각각 전치 6주·3주의 상해를 입힌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서울 강서구 한 공동주택 건물에서 이 씨는 어머니와 외출하려다 집주인 김씨의 딸(20)이 마당의 빨래를 걷는 모습을 보고 “야”라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자 그는 “어른을 보면 인사 좀 하라”고 다그쳤다. 이에 김씨의 딸은 “아빠”라고 소리를 지르며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이 씨는 욕설하며 김씨 딸의 팔을 잡았다. 집에서 잠을 자다 소리를 듣고 깨어난 김 씨는 이 장면을 보고 뛰쳐나오려 했다. 그러나 이 씨 모친 송 씨가 현관문을 막아서며 “우리 아들이 잘못했다. 아들에게 공황장애가 있다”면서 말렸다.
그러나 김 씨는 현관에 있던 죽도를 들고 밖으로 나와 이씨의 머리를 때렸다. 이후 이씨를 더 때리려 했으나 송 씨가 아들을 감싸면서 송 씨의 팔을 수차례 가격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넘어진 이씨는 갈비뼈가 부러졌다. 결국 김 씨는 이 씨에 대한 특수폭행치상, 송 씨에 대한 특수상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린 1심에서 배심원단은 7명 모두 김씨의 행동이 형법 21조 3항에서 정한 ‘면책적 과잉방위’에 해당한다고 만장일치로 평결했다. 해당 조항은 ‘야간 등 불안스러운 상태에서 공포·당황으로 인한 행위’인 경우 정당방위로 인정해 처벌하지 않도록 규정한 것이다. 또 배심원단은 이 씨의 갈비뼈 골절 부상도 김 씨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는 데 모두 동의했다. 이에 재판부는 배심원단 의견을 반영해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행동은 모두 피고인 딸에 대한 위협적 행동이었다”며 “지병으로 몸이 좋지 않은 피고인은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피해자가 술에 취했고 정신질환까지 있다는 말을 듣고 딸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죽도로 방위행위에 나아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어 “피해자들의 부상 정도 등을 보면 피고인이 죽도로 가격한 행위가 사회 통념상 타당성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인정하기 어렵고 야간에 딸이 건장한 성인 남성 등에게서 위협당하는 불안스러운 상태에서 공포, 경악, 당황, 흥분 등으로 저질러진 일”이라며 처벌 대상이 아니라고 판시했다.
이번 재판부의 판단과 관련해 한 법조계 인사는 “그동안 법원에서 정당방위는 상대방이 들고 있던 무기를 빼앗는 수준에서나 인정받을 만큼 요건이 까다로웠다”며 “국민 법감정과 실제 법 적용의 괴리가 커 사법부 비판의 단초가 돼 왔는데 이번 사건은 피고인이 먼저 ‘위험한 물건’인 죽도를 들고 공격했는데도 법원이 배심원 평결을 받아들여 정당방위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이례적 판결”이라고 분석했다.
/신현주 인턴기자 apple260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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