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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의인들]"전쟁은 불행한 일"...日병사 심금 울린 '매국노 아나운서'

<13>반전운동가 하세가와 데루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장

중일전쟁 한창이던 1938년

광둥서 밤마다 군부 비방 방송

일본 제국주의자들 분노케 해

신상공개·가족 인질로 잡혔지만

"타국 침략 난민 지옥으로 몰아"

국제사회에 군국주의 범죄 고발

조국 버리고 해방전사 길 택해

35세때 만주서 사망하기까지

번역·집필 등 활발한 반전활동

하세가와 데루




하세가와와 남편 류런


일본은 1931년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했다. 1932년 만주국을 세우고 지배하에 뒀다. 1937년 7월 베이징 근처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중국군과 충돌한 것을 빌미로 또다시 중국을 침략했다. 침략은 핑진·베이징·상하이·난징·광저우·우한 등 중국 전역으로 확대됐다. 일본군은 속전속결로 전쟁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중국군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전쟁은 장기화됐고 일본 병사들은 지쳐갔다.

1941년 9월 한밤중에 치직거리며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충칭방송국의 일본군을 향한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일본의 장병 여러분, 어디에서 이 방송을 듣고 계십니까. 전쟁은 어떤 때라도 불행한 일입니다. 당신이 쏜 포탄과 총탄은 많은 아이들의 생명을 빼앗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당신들이 나쁜 탓일까요. 여러분은 이 전쟁이 성스러운 전쟁(聖戰)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믿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중략)… 일본의 장병 여러분. 여러분의 뜨거운 피를 잘못된 일에 흘리지 말아 주십시오. 여러분의 적은 바다 건너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이 방송을 들었는지, 그리고 총을 내려놓았는지는 모른다. 이 방송을 듣고 감상을 시로 남긴 병사가 있었다.

‘먼저 동요가 들린다 충칭방송은 /방해전파 계속되는 밤을 /창사(長沙) 작전군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전한다 /충칭방송에 귀를 기울인다 /감미로운 여성의 목소리 /충칭방송 어떤 과거를 가진 사람인가 /충칭방송 그 유창한 일본어를 /몰래 듣고 편안하지 않다.’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로 전쟁 반대를 호소하는 복면 여성의 방송에 일본군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 여성의 정체가 공개된 것은 우한이 함락된 직후인 1938년 11월1일이었다. 일본 ‘미야코(都)신문’에 ‘교성(嬌聲) 매국노, 정체는 이것이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홍콩에 이어서 광둥에서 매일 밤 일본 군부를 ‘비방’하는 방송을 한 여성의 정체는 하세가와 데루(당시 27세)였다. 그와 가족의 신상도 공개됐다. 아버지는 기사가 사실이라면 일본 신민의 명예를 걸고 당당하게 자결하겠다고 밝혔다. 가족이 인질로 잡혔다. 하지만 그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하세가와는 호적에는 데루(テル)라고 기재했지만 데루코(照子)라고 불렀다. 필명은 미도리가와 에이코였고 에스페란토 이름은 ‘베르다 마요(Verda Majo)’였다. ‘베르다’는 녹색, ‘마요’는 5월을 의미한다.

데루는 1912년 야마나시현에서 태어났다. 도쿄 부립(府立) 제3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나라 여자고등사범학교에 진학했다. 재학 중에 에스페란토를 배우기 시작했다. 1932년 나라 좌익문화 운동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치안유지법에 의해 검거됐고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도쿄로 돌아와 ‘일본 프롤레타리아 에스페란티스트 동맹(포에우)’에 가입한 후 에스페란토 운동에 전념했다. 데루에게 에스페란토는 ‘인류 평화를 위한 언어’였고 불의에 맞서는 무기였다. 그는 에스페란토를 이렇게 규정했다. ‘자멘호프가 에스페란토를 만든 것은 대국과 소국, 강국과 약국의 구별 없이 모든 민족의 평등과 독립을 지키는 역할을 하려고 한 것이다. 따라서 만들어졌을 때부터 당연히 에스페란토는 민주적이고 반파시즘적 성격을 가졌다.’





1936년 데루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만주국 출신의 중국 유학생 류런과 결혼했다.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전인 4월 남편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 8월 상하이도 전쟁터가 됐다. 데루는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직접 목격했다. 그는 9월 ‘중국의 승리는 전 아시아의 내일을 좌지우지하는 열쇠다’라는 글을 발표하며 호소했다. ‘원한다면 나를 매국노라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타국을 침략할 뿐 아니라 죄 없는 난민들 지옥을 만들어놓고는 태연자약한 사람들과 같은 국민이라는 게 저에게는 더 큰 수치입니다. …(중략)… 중국의 승리는 중국 민족만이 아니라 일본을 포함한 극동의 전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전 아시아의, 그리고 전 인류의 내일을 좌지우지할 열쇠입니다.’

데루의 나이 25세였다. 그는 스스로 조국을 버리고 고통받는 민족의 해방 전사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행동하는 국제주의자였다.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죄악이라 여겼다. 1938년부터 우한·충칭에서 일본 병사들을 상대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반전을 호소했다. 그리고 국제사회에 일본 군국주의 범죄를 고발하고 중국의 항전을 알렸다. 데루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 건강 악화와 빈곤에 시달리면서도 번역과 집필을 통한 반전활동을 계속했다.

1941년 7월 충칭에서 개최된 문화인대회에서 중국공산당 대표 저우언라이는 데루에게 “일본 제국주의자는 당신을 매국노 아나운서 등으로 부르지만 실제로 당신은 일본 인민의 충실한 딸이자 진정한 일본의 애국자”라고 경의를 표했다.

데루는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딸로만 남지 않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부탁한다. ‘매일 밤, 매일 밤 마이크 앞에 서면 그때마다 ‘어머니’라고 불현듯 외치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내 몸은 불타오르고 가슴은 찢어진다. 다음 순간 내 눈에 떠오르는 무수한 얼굴, 얼굴, 얼굴. 슬픔, 피곤, 굶주림, 분노, 증오로 가득 찬 남녀노소의 얼굴, 얼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뿐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만의 것은 아니다. 이 잔혹한 전쟁 가운데서, 눈물과 신음과 저주의 폭풍우 속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작은 행복에 젖을 수는 없다(‘잃어버린 두 개의 사과-병상에서(1939년4월)’ 중에서).’

일본이 패전한 후 데루는 ‘기로에 선 일본’이라는 글에서 평화국가로서의 일본의 재생을 기원했다. 그는 조국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타민족을 핍박하는 조국을 증오했을 뿐이다. ‘조국을 떠나와서 이미 8년. 조국에 대한 생각은 일본이 앞으로 또다시 폭발하는 화산이 되는 일 없이, 밝고 당당한 섬나라가 되기를 기원한다.’

1946년 데루는 남편 류런과 함께 그의 고향인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1947년 1월10일 중절수술 중 감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3개월 후인 4월22일 남편 류런도 사망했다. 이 둘은 자무쓰(佳木斯) 혁명열사묘원에 모셔져 있다.

누군가는 ‘매국노’였던 그를 기억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조국이 아니라 평화와 정의를 선택한 그를 기억해야 한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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