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이춘재(56)가 굳게 닫혔던 입을 열며 내뱉은 말이다.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하던 그는 “DNA 증거가 나왔다니 할 수 없지 않냐”며 경찰이 제시한 새로운 증거에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모방범죄로 밝혀진 8차 사건을 제외한 9건의 화성사건 모두를 포함해 총 14건의 살인과 30여건의 강간 및 강간미수 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자신의 처제를 살해한 사건을 포함하면 이씨가 저지른 살인은 15건으로 늘어난다. 자백이 사실이라면 이씨는 20명의 여성을 살해한 유영철(46)에 버금가는 연쇄살인범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장인 반기수 경기남부지방경찰청 2부장은 2일 경기 수원시 연무동 경기남부경찰청 강당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미제사건전담팀과 프로파일러를 투입해 총 9회에 걸쳐 대상자에게 접견 조사를 진행해 현재까지 총 14건의 살인과 30여건의 강간 및 강간미수 범행에 대한 자백을 받아냈다”면서 “구체적 사건의 기억이 단편적이거나 사건에 따라 범행 일시·장소·행위형태 등이 편차가 있어 계속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경기 화성군 일대에서 여성 10명이 강간·살해된 화성연쇄살인사건 중 8차 사건을 뺀 나머지 9건과 전혀 다른 5건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털어놓았다. 다른 5건은 화성사건 전후로 화성 일대에서 3건, 이씨가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살해하기 전까지 2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브리핑에서 경찰은 화성사건 이외의 미제살인사건 5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묻는 것에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경찰은 이 기간 화성과 청주 일대에서 발생한 유사 사건과 이씨와의 연관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씨가 자백을 하게 된 계기는 DNA 증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씨를 아홉 차례 원정대면 조사했다. 이씨는 줄곧 혐의를 인정하지 않다가 대면조사가 이뤄진 지난주 돌연 자신이 화성사건의 범인임을 인정했다. 경찰이 화성사건의 5·7·9차 사건 증거물에서 나온 DNA와 이씨의 것이 일치한다는 증거를 제시하자 “DNA 증거가 나왔다니 할 수 없다”며 자백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지난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부터 4차 사건 증거물에서 검출된 DNA도 이씨의 것과 일치한다는 통보를 받았으나 이씨는 그 이전부터 심리적인 방어선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이씨는 경찰이 DNA 분석 결과를 알려주자 또 일부 범행이 이뤄진 장소에 대해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하는 등 범행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했다고 경찰 관계자는 전했다. 반 부장은 “프로파일러와의 라포르(rapport·정서적 친밀감)가 형성된 상태에서 국과수 감정 결과를 제시한 것이 자백을 하게 된 계기가 아닌가 판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범죄심리학자들은 이씨가 화성사건의 진범으로 특정되면서 사실상 가석방 가능성이 사라진 것도 범행을 실토한 이유로 분석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연쇄살인범에게서 볼 수 있는 과시적 성향, 즉 자신이 범죄를 수차례 저질렀음에도 검거되지 않은 데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 보이려고 살인은 물론 성범죄까지 추가로 실토했다는 것이다. DNA 분석 결과와 목격자 진술에다 용의자 본인의 자백까지 나왔지만 이씨가 진범인지를 추가 수사를 통해 밝혀내야 하는 과제는 여전히 남았다. 반 부장은 “대상자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의 수사기록과 관련 증거, 사건 관계자 등을 상대로 면밀하게 수사할 예정”이라며 “이번 수사의 최우선 목적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이라고 말했다. /수원=이희조기자 lov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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