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정치면 기사 속에는 온갖 갈등과 분노를 표출하는 공격적인 단어와 문장들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단어와 문장에는 보이지 않는 칼날이 장착되어 있어, 그런 날카로운 대화나 기사들을 듣거나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어떻게 이 증오와 폭력의 언어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안착되었지만 ‘심리적 차원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요원한 것 같다. 심리적 차원의 민주주의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나는 이제 민주주의가 절차적 차원과 제도적 차원을 넘어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단계’까지 가야 한다고 믿는다. 심리적 차원의 민주주의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아픈 마음까지 헤아려주는 민주주의이며, 내가 나의 주장을 말했을 때 남들이 받을 충격이나 상처까지 보살피는 민주주의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비폭력적인 대화, 타인의 마음에 상처와 충격을 주지 않는 대화를 나누는 기술을 익혀야하지 않을까.
얼마 전에 루이저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을 다시 읽으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대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실감했다. 주인공 매기, 조, 베스, 에이미 자매의 이웃으로 등장하는 로리네 가족은 명문가이자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지만 로리는 늘 우울하고 외로웠다. 조 마치의 집처럼 늘 사랑과 대화가 넘치는 집이 아니었던 것이다. 로리는 오히려 가난한 조 마치네 아이들을 부러워한다. 그 집에는 그칠 줄 모르는 수다와 따스한 배려, 서로를 향한 무한한 애정이 살아숨쉰다. 베스는 자매들 중에서도 가장 말없는 소녀였다. 말수가 적을 뿐 아니라 겁이 많아서 로렌스씨가 ‘어험’하고 인기척을 내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려 다시는 로리네 집에 가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로리네집엔 베스가 감탄해 마지않는 아름다운 피아노가 있었다. 베스는 피아노를 한 번만이라도 연주해보고 싶었지만, 로렌스할아버지가 너무 무서워 그 집에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로렌스 할아버지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베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묘안을 짜낸다. 마치 베스에게 전혀 관심없는 것처럼 딴청을 부리면서 베스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눈 것이다. 로렌스 씨는 베스의 어머니에게 유명가수를 직접 본 이야기,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를 들은 일을 이야기하며, 베스가 엿듣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한다. 베스의 흥미를 유도해서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호기심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베스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차츰차츰 로렌스씨 뒤쪽으로 다가와서 그의 의자 뒤에서 걸음을 멈춘다. 부끄러움에 뺨을 붉히면서도 로렌스씨의 이야기에 혼을 빼앗긴다. 로렌스 씨는 베스에게는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은 채 베스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 피아노를 그대로 놔두면 언젠간 망가질 것이 뻔하니, 따님들 가운데 누가 우리 집에 와서 피아노를 연주해주시면 어떨까요” 베스는 뛸 듯이 기쁘지만 너무 떨려서 말을 할 수도 없다. 로렌스씨는 베스의 모든 두려움을 간파하고 이렇게 안심을 시켜준다. “따님이 우리 집에 온다면 그 누구와도 부딪히거나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을 겁니다. 시간 날 때 방문해서 피아노만 연주하고 가시면 됩니다.”
로렌스씨는 베스가 얼마나 예민하고 내성적인 아이인지 알아채고, 베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보호해준 것이다. 그 아이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그 아이가 가장 원하는 것을 두려움 없이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다. 베스가 자신의 말을 뻔히 듣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어머니만 바라보며 말하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베스는 로렌스씨의 친절과 배려에 깊은 감동을 받은 나머지 수줍음조차 잊고 피아노를 연주하러 꼭 가겠다는 의사를 표현한다. 베스의 가족들과 이웃들은 베스의 내성적인 성격을 향해 그 어떤 비난도 질책도 하지 않는다. 베스가 남들보다 좀 더 천천히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한없이 기다려주고, 아무리 숨기려해도 숨길 수 없는 그녀의 재능과 아름다운 마음씨를 헤아려준다. 그 사람이 어떤 상처도 받지 않도록, 그에 대한 그 어떤 판단도 조건도 유보하는 것. 그가 언젠가 마음을 표현할수록 조용히 길을 열어주는 것. 조건 없는 사랑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차분한 기다림은 어떤 마음의 장벽도 밀어낼 수 있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비폭력대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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